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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멕시코 이주 100주년] <4> 쿠바 혁명의 회오리

by 최재민 선교사 2020. 11. 9.

 

 

[멕시코 이주 100주년] <4> 쿠바혁명의 회오리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집필한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 말처럼 한인 이민자 ‘애니깽’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잘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 헤밍웨이는 글을 쓰기 위해 쿠바를 찾았지만, 멕시코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지칠 대로 지친 한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카리브 해를 건넜다.》

 

 

스페인어를 배운 한인 1.5세들에 의지한 멕시코 한인 274명은 1921년 3월 11일 쿠바 마나티 항에 도착했다. 

국적 문제로 17일간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삼켜야 했던 것도 잠시, ‘일거리도 많고, 사탕수수 농장은 임금도 많이 준다’는 말을 믿고 쿠바에 도착한 한인들은 대부분 실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공급 과잉으로 국제 설탕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애니깽을 만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애니깽을 자르는 일뿐이었다. 

 

 

 

 

핑카 엘 볼로 애니깽 농장에서 태어난 주하엽(세실리아 주 키아오·79·여) 씨는 “초기 농장생활을 했던 한인들은 ‘내일은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고 기억했다. 

한인들은 공짜로 구할 수 있는 피마자 잎을 잘라 김치를 담갔다.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은 술에 의지하곤 했다. 

 

이런 쿠바 한인들을 구원한 것은 높은 교육열이었다. 가난을 대물림할 수는 없었다. 

한인회가 1922년 11월 4일 마탄사스 주 정부에 제출한 한인회 회계장부에는 교육에 대한 한인들의 집념이 담겨 있다. 1년간 지출한 회비 372페소 가운데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한 항목은 144페소에 이르는 ‘학교 지원비’. 반면에 사무실 임대료는 72페소, 전기료는 36페소, 기타 사업은 30페소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를 후원해 1997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임천택(任千澤) 선생은 쿠바 한인 가운데 ‘자식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례. 

그의 장남 헤르니모 임 김(임은조·78) 씨는 한인 가운데 최초로 대학에 들어갔다. 아바나대 법대에 다니던 시절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그는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의 선봉에 선 주역의 하나였다. 

 

경찰관으로 출발한 그는 혁명정부 식량산업부에서 차관급에 올라 한인 출신으로는 최고위직에 진출했다. 마탄사스 종합대 철학과 교수로 일했던 마르타 씨(66·여)를 포함해 그의 동생 8명은 무상교육을 내세운 혁명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 

뒤이어 다른 한인 후손들도 조금씩 대학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쿠바 한인 사회는 비교적 빨리 뿌리를 내리는 듯했지만 1959년의 쿠바 혁명으로 다시 한번 요동친다. 

 

 

 

 

카스트로 혁명정부는 사유재산을 동결하거나 몰수했다. 천신만고 끝에 쿠바 사회의 중산층으로 성장한 한인 상인들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공산혁명 직후 부르주아로 몰린 일부 한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거나 멕시코, 중남미,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인 사회도 갈라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르데나스 애니깽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를 규합해 혁명에 앞장섰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그만 전투에서 반혁명군으로 참여한 한인도 있었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한편으로는 어렵게 살고 있던 한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한인 사회를 괴롭히던 외국인 배척주의와 차별 고용도 사라졌다. 무상교육과 무상배급 제도로 한인들은 쿠바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급속히 쿠바 사회로 동화됐다. 

 

현재 750명 남짓한 쿠바 한인 가운데 의사만 16명에 이르고, 20여 명이 엔지니어로 활동한다. 변호사, 교수 등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는 인물도 수십 명에 이른다. 멕시코 한인들보다 낫다. 

그렇다고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한인뿐 아니라 쿠바의 현실이 그렇다. 

차관급을 지내 한인 사회에서 가장 형편이 나은 임 씨의 가족은 매달 40달러(약 4만1000원) 남짓한 연금과 얼마 안 되는 배급 쌀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토마스 이 차(이호영·74) 씨도 쿠바 혁명군에 참여해 4년간 앙골라에 파견돼 공산혁명을 지원했지만 매달 6달러(약 6200원)에 불과한 연금이 전부다. 코흘리개 꼬마들이 집에서 만든 캔디를 팔아야 하는 지경이다. 

 

1990년대 초 아바나에 북한 식당 ‘모란봉’이 문을 열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쿠바인들은 한국 음식을 먹지 않았고, 한인들은 한국 음식을 사먹을 돈이 없었다. 

 

아바나·마탄사스=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쿠바의 한인회▼ 

현재 쿠바에 거주하는 한인 후손은 750여 명. 그러나 하나로 묶어 주는 한인회가 없다. 

한인들은 1921년 6월 마탄사스에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했고, 마탄사스 주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7년 한인회는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등록 회원 수대로 매년 내야 하는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쿠바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는 헤르니모 임 김 씨는 “4년 전 정부에 한인회 재등록 신청을 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 정부는 사적인 조직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임 씨는 조심스럽게 한인 후손들을 찾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한글을 잊은 후손들을 위해 스페인어로 한국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책을 얻고 싶다”며 “한글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쿠바의 北대사관▼ 

북한은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0년 8월 쿠바와 국교를 맺고 이듬해 4월 수도 아바나에 상주 대사관을 열었다. 

아바나에 진출한 북한은 곧바로 한인사회와 접촉했다. 

북한의 쿠바 방문단은 1961년 3월 국립은행 총재에 이어 공업장관을 지내던 체 게바라의 주선으로 쿠바 한인사회 지도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한인들은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한글로 된 잡지를 얻었다. 한글로 된 책을 구하지 못하던 이들에겐 좋은 교재였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아바나는 물론이고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의 한인 마을을 직접 방문했다. 당시는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다. 쿠바 한인을 북한 지지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한인 가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한인들이 보관하던 사진 속에서 태극기를 발견한 뒤 ‘반동’이라며 펄펄 뛰었다. 태극기를 본 당시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쿠바의 한인들이 남한 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소동은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착각 때문이었다. 한인들이 멕시코와 쿠바로 이주했던 1900년대 초반 태극기는 이미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태극기의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남한의 국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엉뚱한’ 반응을 나타낸 셈이다. 

 

출처: 동아일보, 200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