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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

[멕시코 이주 100주년] <5> 희망과 미래

by 최재민 선교사 2020. 11. 9.

 

 

 

[멕시코 이주 100주년] <5> 희망과 미래

 

 

 

2005년은 한인 멕시코 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 해군 순항훈련 함대가 당시 멕시코 이민 1세대의 항로를 따라 16일 첫 방문지인 남서부의 살리나크루스항에 기항했다. 1905년 4월 인천항을 떠난 한인 1033명은 1905년 5월 12일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한 뒤 유카탄 반도 에네켄 농장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키에네스(Quien es·누구냐)?.” “치노(Chino·중국인들) 왔어.” 최근 멕시코 메리다 인근 지역의 한인 가정을 찾은 율리세스 박 메리다 한인후손회장(64)은 잠시 당황했다. 한인 5세대인 어린 소녀가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를 잠시 쳐다본 뒤 어머니에게 중국인이 찾아왔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뭔가 메울 수 없는 공백이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박 씨는 한인 후손들에게 정체성을 찾아주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지 다시 한번 절감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아라셀리 김 씨(31·여)는 코레아노의 긍지는 물론이고 메히카노(멕시코인)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한 한인 4세. 한국과 멕시코의 축구경기가 열린다면 누가 이겨도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한국부터 가르치고 싶다는 김 씨. 그렇지만 그 자신부터 한국을 모른다. 안타깝지만 애니깽(Henequen·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일했던 선조들의 얘기도 잘 모른다. 

한인 4, 5세대에 해당하는 신세대들은 굳이 한인이냐 멕시코인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두 그룹 모두에 속해 있다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문제는 한국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해 12월 중순 멕시코시티 브리스톨 호텔에서 열린 한인 후손회의 망년회. 기자도 후손들의 초청을 받았다. 

한인 5세대인 비리비아나 김(18), 제니퍼 김 양(12) 자매에게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국과 관련된 정보나 얘기를 접해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자가 “오늘 행사가 뭔지 아느냐”고 다시 묻자 자매는 “할아버지가 잔치가 있다고 해서 그냥 따라왔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멕시코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했던 황보영주(皇甫永周·후앙 푸·1895∼1959) 씨의 외손자 루돌프 김 김 씨(34)는 달랐다.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본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그는 그러나 부모 세대의 생활과 지금의 현실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산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일본 제품을 판다는 게 아이러니”라고 웃으면서도 “사업은 사업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인 사회의 미래=한국 국제교육진흥원 지원으로 한국에서 9개월간 한글교육을 받았던 세이디 올센 아길라 씨(23·여)는 “멕시코 친구들은 나를 보고 코레아노라고 하는데 한국에 갔더니 나를 외국인이라고 해서 서운했다”고 말했다. 멕시코 인과의 급속한 혼혈에 한국어까지 잊은 애니깽 후손들로서는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일인지 모른다. 

 

다만 한국 음식문화는 여전히 한인 후손을 묶고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하나다. 애니깽 농장생활 초기에 고추 마늘 된장 간장을 구하지 못해 고생했던 한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에서 구한 재료로 김치를 담그고 장조림, 만두, 국수를 만들었다. 지금도 한인 후손들은 삼일절 등 기념일에 모여 한국 음식을 만든다. 

유누엔 김 델라루스 씨(21·여)는 “한국말은 못하지만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며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한국 문화를 접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고 말했다.

 

오유키 오르테스 신 씨(24·여)는 자신이 한인 후예라는 사실이 즐겁다고 했다. 

한국문화를 한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그는 메리다 지역의 최고령자 고흥룡(高興龍·아순시온 코로나 김·100) 옹이 한글을 쓰는 것을 보고 한글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고 옹의 집을 드나들던 그는 한글로 ‘내 이름은 오유키예요’라고 또박또박 써내려갈 정도가 됐다. 한국을 방문해 한국문화를 깊이 체험하는 것이 소원이다.

 

멕시코의 한인 후손들과 한국을 잇는 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16일 한국 해군 순항훈련 함대가 애니깽 이민선 일포드호가 처음 도착했던 멕시코 남서부 살리나크루스 항에 입항했을 때도 좋은 기회였다. 

당시 이곳에 모였던 한인후손 200여 명은 한국에서 선박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품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감격을 떨치지 못했다. 

 

멕시코시티=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천세택 멕시코 한인 100주년 기념 후원회장 인터뷰▼

 

 

“한인 멕시코 이주 100주년 기념행사는 멕시코 한인들이 새롭게 일어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천세택(千世澤·53·사진)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기념사업 후원회장은 5월 멕시코시티에서 개최할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100년 전 ‘노예 이민’으로 출발한 한인의 후손들이 쓰라린 역사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급속한 혼혈로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한인 후손들에겐 이번 행사가 100년 뒤 한인사회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동시에 멕시코인들이 한인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관을 씻어내고, 한인의 개척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천 회장은 강조했다. 

그는 “멕시코의 한인들은 고국이 어려울 때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립 성금을 보내던 애국지사의 후손”이라며 “2005년을 새로운 한인 공동체 형성의 출발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 

천 회장은 현재 한인 멕시코 이민사 정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인 이주자들이 초기에 겪었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후손들이 조상을 기억하고, 한인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 한인 후손들의 고국 산업연수를 추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지붕 두가족된 멕시코 한인사회▼ 

한인들이 멕시코에 이주한 것은 1905년이지만 한국과 멕시코 정부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1962년까지 기나긴 공백기가 있었다. 

외교관계 수립 5년 뒤인 1967년부터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우리 국민의 멕시코 이민이 이뤄졌지만,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국적을 가진 이민자는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애니깽 후손들은 이미 멕시코 현지화가 이뤄졌다. 새로 온 한국 국적 이민자들과는 생각이나 성격도 다르다. 두 이민사회가 하나로 뭉치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처리하려는 신규 이민자들과 달리 느긋하고 급할 것 없는 애니깽 후손들이 함께 뭉쳐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도 쉽지 않다. 두 이민사회는 자연히 멀어졌다. 

별다른 교류를 갖지 않던 두 이민사회는 그러나 한인 이주 10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만남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는 멕시코 한인회 사무실에 애니깽 후손회 사무실이 입주하면서 새로운 ‘공존의 실험’을 시작했다. 

이광석 멕시코시티 한인회장은 “100주년 기념행사 하나만으로 두 이민사회가 하나로 되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인 1만5000명과 애니깽 후손 3만여명이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갖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동아일보, 2004-01-06, 멕시코시티=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