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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

회상 :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노동 / 최병덕 - 1

by 최재민 선교사 2021. 1. 18.

 

 

교포역설(僑胞歷說)

 

 

1973년 최병덕이 멕시코 이민 생활의 경험을 자전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로 원래는 스페인어로 된 타자본(打字本)인데, 한국어로 번역한 책 이름은교포역설(僑胞歷說)이다. 이영숙이 유까딴의 첫 코리언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발간하였고, 그 뒤 서성철이 회상 :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인들의 삶과 노동으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최병덕의 멕시코 이름은 호세 산체스 팍(Jose Sanchez Pac)이다. 아버지 최정식(崔貞植)1905년에 멕시코로 배를 타고 이민하였던 이민 1세대인데, 어렸을 때 이름은 인천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인출(仁出)이라 하였다. 최병덕은 1962년에 한국과 멕시코가 국교를 맺을 때 멕시코시티 한인회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1985년에 사망하였다. 이 책은 최병덕 자신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멕시코 이민 역사이다. 곧 그는 멕시코로 이민을 와서 들은 이야기나 직접 경험한 사건을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이야기나 사건 등은 대부분 정확한 편이다. 다만 인천에서 멕시코의 유카탄으로 이민을 오는 부분은 이민 1세대 어른에게서 들은 것을 바탕으로 기술하였으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기도 하다. 3·1운동 당시 한인들의 독립운동이나 도산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한 내용은 다소 다르다

이 책은 멕시코로 이민을 간 사람이 직접 쓴 최초의 멕시코 이민사로 평가되고 있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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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상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국인들의 삶과 노동

 

MEMORIAS

DE LA VIDA Y OBRA DE LOS COREANOS EN MEXICO DESDE YUCATAN

 

저자 : 최병덕 (Jose Sanchez Pac)

역자 : 서성철

 

 

서문

 

금세기 첫 10년대, 영구적인 착취를 위해 인신매매가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던 그 시기,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는 소위 평민 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양반 계급의 사람들(즉, 귀족들이나 지주 계급)에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 그들에게 들씌웠던 노예 상태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시도했었다. 시간이 서서히 흐르면서 이 평민들은 주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노동자 계급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자신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끝없이 이어졌던 착취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들은 여전히 '상민(常民)'들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권리란 인간 자신의 투쟁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그러나 피지배 계급은 감당할 수 없는 역경에 처하게 되면 그들은 쉽게 약함을 드러내거나, 체념하고, 또 현상에 안주해 버리기 때문에, 이제껏 그들 평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세기인 1860년대에서 1870년 사이, 멕시코나 미주 대륙,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노예 해방 운동이 동시에 시작되었고 발전되어나갔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이 운동은 지연되었다. 즉 1870년에서 1910년 기간 동안 노예해방운동은 멕시코에서 억제되었고 실제 40년간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동안 멕시코 국민들은 헌법상에 명시된 법을 알지 못했는데, 이 불쌍한 사람들은 시민으로 간주되기는커녕 인간으로 대접받지도 못했던 것이다. 정의! 이 말은 정부(관료사회)에 빌붙어 먹는 몇몇 계층과 핵심 인물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것이었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유까딴 지방의 대농장주들은 에네껜(Henequen)농장에서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노예 주인들이었다.

 

이런 체제가 몰락해 가고 있던 금세기 첫 오 년에, 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인 이민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 조선반도에서 유까딴 반도로, 다시 말해 저 '머나먼 극동에서 아메리카 대륙'인 멕시코 땅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유까딴 농장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에네껜 밭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던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밤늦게 자주 모여서 그들이 겪었던 엄청난 고생담들을 서로 나누곤 했는데,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그들이 계약자로부터 속았고 형편없이 다뤄졌으며, 또 한편으로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유년기에 들었던 이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고 명심했다. 그리고 내가 지닌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기록해 남기기로 결심했다. 독학이라 이 글이 때때로 거칠고 문학적인 소양 없이, 한마디로 두서없이 쓰였음을 여러분들이 용서해 주리라 바라면서...

                                                                                - 저자 -   

 

 

계약자들

 

가능성은 어디에도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금세기 초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뭐 그렇게 대단할 게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옛 과거지사의 일이 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무슨 교훈 따위를 줄까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는 과거의 반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만능의 시대에 교훈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험가인지 떠돌이 꾼인지, 아니면 전문 사기단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그런 사람들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독일인, 한국인, 그러고 일본인 이 세 사람이 유까딴 반도의 평원을 개척할 목적으로 메리다(Merida) 지방에 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뭔가 사업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위해 사전에 이미 에네껜 농장주들과 접촉을 가졌고(사업 예측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 뒤 유까딴 지방에는 농장 노동자들의 일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뒤 그들이 이 부족한 노동력을 지구의 저편 끝에서 데려오기로 합의했으리라.

 

사업을 위해 그들은 대농장주들과 만났고, 각각의 이익에 걸맞은 협약을 맺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주정부에 허가를 신청했고, 주정부 역시 연방정부에 동건을 인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계약을 추진하기 위해 곧바로 한국으로 달려갔다.

 

 

모집광고

 

 

태평양 횡단

 

당시 조선은 인구 2천만에, 22만 231㎢의 면적, 그리고 십삼 개의 도(道)로 구성된 군주 국가였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볼 때, 계약자들이 한국의 인천항까지 가는데 얼마만큼 힘이 들었을까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이들은 도착하는 즉시 이민 모집 광고를 냈다. 그러나 광고문에 계약조건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모든 것은 거짓뿐이었다. 그들의 이런 의도는 어떡해서든지 무지몽매한 한국인들을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해서였다. 이 모집 광고는 전국 방방곡곡에 유포되었고, 거기에서 모이는 장소는 서울에서 32 킬로미터 떨어진 인천항이라고 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집 광고문을 읽고서 들떴다. 특히 경제적 궁핍으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험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 광고문에는 이민 자격조건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몇 사항들이 언급되어 있었다.

 

- 40 세를 넘지 않을 것. 

- 신체장애인이 아닐 것. 

- 배우자가 있는 여자들도 허용됨. 

- 15세 이하의 어린이도 허용되나 노동자로는 고려되지 않음.

 

이렇게 조금씩 사람들이 인천항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계약자들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일 때마다 도시 외곽에 천막을 제공했으며, 이민 지원자들은 등록한 날부터 계약자들로부터 음식을 제공 받았다.

 

그곳에는 귀족이나 양반에서부터 걸인까지,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였다. 소위 양반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그곳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하층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말씨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또 서로 융합될 수 없었다. 이런 언어 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층민이 쓰는 말이나 평민들이 쓰는 말 그리고 귀족이나 상류층이 쓰는 교 양어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몇 달 뒤, 드디어 배에 승선하는 날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필요한 짐꾸러미들을 챙겨서 서둘러 화물선에 올라탔다. 많은 사람들이 밀항을 기도하기도 했으나 감시원이 등록 서류를 대조하는 바람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조선이나 멕시코 정부는 이 계약에 대해 알았지만 양국 정부 사이에는 이민자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협정도 체결되어 있지 않았고, 사전에 대화조차 없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이주에 필요한 절차들이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실제로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대지를 경작할 인간의 노동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 이민자들은 단기 4238년 2월 12일, 한국을 떠나 서기 1905년 4월 15일 멕시코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두 역(曆)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잘 모르지만 어찌됐든 이 여행은 75일이나 걸렸다.

 

일단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가능한 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이 화물선이 아무리 컸다고 해도 아녀자를 포함한 1,033명의 이민자들, 일본인 요리사들, 침대칸을 쓰고 있던 독일인 선원들 모두를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한국인 이민자들은 인간 대접받기는커녕, 흡사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모진 대우를 받았다.

 

바다에 나온 지 삼일 째 되는 날, 누군가가 왜 여권을 주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소요가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민 주선자들은 배를 다시 인천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인천에서 이민자 각자에게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로 쓰인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한국인들은 그 여행증을 보물처럼 간직했다. 그러나 이 증명서는 실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약에 근거, 4년밖에는 법적 효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인들은 이 서류를 조심스럽게 언제나 간직하고 다녔다.

 

배 안에서 제공된 음식은 상상할 수없을 만큼 나빴다. 주로 밥과 '김치'(양념을 친 채소), 고기 스프가 식사로 나왔는데 그나마 배급제였고 맛도 형편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로 또는 병에 걸려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른 두 사람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바다에 수장이 되어 결국 물고기 밥이 되었다. 어린이 하나도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인천에서 살리나 끄루스(Salina Cruz)항까지의 태평양 횡단 여행에서 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살리나 끄루스에서 메리다까지

 

밤이 돼서야 배는 살리나 끄루스 항에 도착했지만 수심이 너무 깊어서 부두에 입항할 수 없었다. 해서 다음날까지 배는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 있어야만 했다. 그 후 사람들은 작은 거룻배나 통나무배로 갈아타고 항구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루 온종일 배에서 사람들과 짐을 실어내는 일이 끝나자 오후 늦게 세 사람의 멕시코인이 나타났다. 이민주선자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민담당 관리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모두들 먼 나라 이국 풍습대로 그들 고유의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고 저마다 담뱃대를 들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갓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옹기종기 모여서는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들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말할 기분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육지에 머무르는 동안 배에서 음식물이 날라져 왔다. 그 날 밤 그들은 들판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기차에 타라는 지시가 전달됐다. 모두들 짐을 챙겨 서로 밀치면서 기차에 올라타서는 좋은 자리를 잡느라 야단법석을 피웠다. 정오가 되자 기차는 자그마한 한 마을에 섰다. 조금 있으니 "점심 식사 배급할 테니 와서 받아 가시오" 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기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윽고 종착역에 도착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곳에 내렸다. 그들은 거기가 어디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고, 어디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내린 곳은 베라끄루스(Vera Cruz) 주 '꼬아싸꼬알꼬스(Coatzacoalcos)' 기차역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어떤 평원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사람들은 파도 소리와 태풍으로 그들이 항구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밤이라 바다는 볼 수 없었고 멀리서 등대의 불빛만이 가물가물 보였다.

 

다음날, 그들은 동양식으로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제공받았다. 이렇게 또 이틀을 보내고 나자 커다란 배가 하나 도착했고, 그들을 다시 유까딴주의 쁘로그레소(Progreso) 항구로 싣고 갔다. 항해는 꼬박 이틀 밤하고 한나절이 걸렸다. 살리나 끄루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항구에서도 사람들을 실어 내리기 위한 운반선들이 동원됐는데 그 배들은 예전 것보다 더 작은 거룻배들이었다. 이 항구에 내리자마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기차에 곧바로 올라탔다. 

 

쁘로그레소 도시는 한눈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보였다. 그들은 부두가 가까이에 있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메리다(Merida)시로 곧장 들어왔다. 기차에서 내리자 그들은 다시 어떤 평원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전번 경우하고는 달리 그들은 비를 막을 수는 없지만 햇빛은 가릴 수 있는 커다란 간이용 천막을 제공받았다. 이는 아마도 우기(雨期)가 아닌 탓도 있었지만, 그곳에 머무는 것이 일시적이었기 때문인 듯 했다. 천막에 기거한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식사 대신에 곡물이나 양념거리를 제공받았다. 이 곡물들은 그들로부터 배급받은 것으로 그들은 이것들을 가지고 직접 식사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한편 그들이 손수 밥을 지어먹을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양은 냄비와 땔감도 공급되었다. 이렇게 그들 식대로 밥을 해 먹으며, 노천에서 잠을 자는 생활이 이 주일이나 계속되었다. 덮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들이 떠날 때 입고 있었던, 이제는 걸레 누더기가 다된 옷뿐이었다.

 

 

농장으로

 

한편 기나긴 여행길의 고생에서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한 한인들은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생활에 모두들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유도 거의 없는 데다 돈마저 없는 그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노천에 내팽개쳐 있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럴 즈음 웬 농장주 하나가 몇몇 사람들을 대동한 채, 그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옷을 쪽 빼입었으며,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때 한국인 이민자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친 점이 하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옷을 제일 근사하게 입은 사람이 마차에 그대로 앉아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뒤에야 한국인들은 그가 그저 마부의 유니폼을 입은 일개 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장주들이 오는 것을 본 계약자들은 이민자들에게 일어나 정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농장주들 중에서 제일 먼저 도착한 농장주가 손에 든 지팡이로 이민자들을 가리키며 그룹별로 서로 떨어져서 있으라고 명령했다. 그가 그렇게 지시한 것은 가장 좋은 사람들, 다시 말해 가장 건장한 사람들을 고르려는 목적에서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뽑혀지자 농장주들 중의 하나가(계약자들이 아니라) 각자에게 뭔가 쓰인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잠시 후, 종이 쪼가리를 나누어 준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계약자들은 사람들을 그룹 별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정오가 지난 뒤, 모두들 걸어서 기차역을 향해 떠났다. 어떤 그룹은 가까운 기차역으로, 또 다른 그룹들은 멀리 떨어진 기차역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메리다시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기차역이 세 곳 있었다. 이 세 기차역 중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역 이름은 '라 메호라나(La Mejorana)' 기차역이었다. 그 뒤 얼마인가 이 세 기차역은 합병되어 '유까딴 연합철도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농장주가 돈을 제일 많이 지불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노동자들을 가장 많이 데리고 갔기 때문이었다. 다른 농장주들은 특별히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첫 번째 농장주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노동자들을 데리고 갔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 이민자 모두는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맨 마지막으로 온 농장주는 한사람만 데리고 갔는데, 이것은 밭을 개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농장에 한국인 하나쯤 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고, 또 남에게 자랑할 목적에서 데려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인 농장 노동자들은 모두 22개 농장으로 분산되어 갔는데, 그 농장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첸체 (Chenche) 

2. 아스꼬라 (Azkora) 

3. 수꾸 (Zuku) 

4. 부에나 비스따 (Buena vista) 

5. 친낄라 (Chinkila) 

6. 띠시민 (Tizimin) 

7. 산 엔리께 (San Enrique) 

8. 사씰 (Zacil) 

9. 산 후란시스꼬 (San Francisco) 

10. 산띠아고 (Santiago) 

11. 깐깝첸 (Kankapchen) 

12. 꾸까 (Kuka) 

13. 노헤용 (Nogeyong) 

14. 이친깝 (Itzinkap) 

15. 산 안또니오 (San Antonio) 

16. 사낙따 (Sanaktah) 

17. 춘추꾸밀 (Chunchukumil) 

18. 야스체 (Yazche) 

19. 초촐라 (Chochola) 

20. 꼬옵차까 (Kohopchaka) 

21. 산따 로사 (Santa Rosa) 

22. 떼모손 (Temozon)

 

 

농장에서의 준비물들

 

마지막 한 사람을 포함해서 한국인들 모두는 각 농장 대리인들의 인도하에 떠나갔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한 가족 당 초가집 하나씩이 배당되었다. 칸막이 벽과 양철지붕을 가지고 있는 초가집도 있었고 기와가 얹혀 있는 초가집도 있었다. 가장 볼썽사나운 경우로 그저 나뭇가지와 지푸라기에 진흙을 발라 만든 벽, 그리고 그 위에 목초를 올려만든 지붕의 초가집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집이든지 물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몇몇 농장에는 반경 200미터 내에 우물이 딱 하나 있었다. 다른 농장들의 경우에는 농장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이 우물은 보통 수심이 30-40미터 정도로 깊었기 때문에 특별히 말을 이용해서 물을 퍼 올리게 되어있었다. 이런 곳에 거주했던 사람들, 특히 부인네들은 그들의 집으로부터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물을 길어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몇몇 좋다고 하는 농장은 괜찮은 우물들은 제법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의 수심은 대체로 10미터 내지 15미터 정도로서 별로 깊지 않았다. 이런 우물은 활차나 굵은 밧줄을 이용한 도르래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또 어떤 농장에서는 수심이 5미터 내지 15미터 되는 세노떼(cenote: 물웅덩이)의 민물 지하수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펌프로 이 물을 끌어 올린 뒤 수도 파이프를 통해 농장의 밭들에 물을 대었고, 에네껜 잎사귀에서 섬유를 추출하는 압착기가 가동하는데 필요한 증기를 만들기 위해 보일러에 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인 부인네들도 원주민 여자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들 역시 농장일이 끝난 후 남자들이 거들어 주긴 했지만 물을 길어 와야 했던 것이다.

 

농장에 도착하고 나서, 여러 날 동안, 식사 때가 되면 한국인들에게는 이미 마련된 음식이 배급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까딴 고유의 음식을 어떻게 먹는 줄도 몰랐고 게다가 그런 음식은 그들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다. 오직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어떤 음식인지도 모른 채 먹었어야 했으니 그 고통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이민 온 어떤 부인네 한 분이 들려준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부엌에 있다가 멕시코인이 원두커피 거르는 것을 목격하고는 동료 부인네에게 이 광경을 잽싸게 일렀다. "저 사람들 하는 짓거리 보라고. 건더기는 지들이 먹으려고 남겨두고 우리한텐 물만 주려고 거르는 모습을." 이 이야기는 당시 커피가 무엇인지 몰랐던 한국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천에서 여러 날 잠자는 생활을 한 후에야 한인들에게 잠자리용으로 나무판자가 도착했다. 어떤 농장에서는 이런 나무판자를 이미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다 계약조건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했다. 어찌됐든 한국인들은 그것들을 이용해 그들 나름대로 침상을 만들었다. 한편, 한인들은 직영상점(Tienda de Raya)에 가 외상으로 물건을 사서는 그들 고유의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그들이 스페인어를 몰랐기 때문에 사고자 하는 물건 이름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주로 손짓으로 점원들과 의사소통을 하고는 했다. 손님이 컵을 달라고 했을 때, 점원이 접시를 내놓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그들 사이에서 손짓 발짓 방법이 통했었다고 얘기할 수 있으리라.

 

 

농장에서의 노동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통보되었다. 아침 6시가 되자 정말로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을 깨우는 것은 농장주들이 원주민 노예들로부터 두 시간의 무보수 노동, 즉 그들로부터 임금을 갈취하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농장에서 일어났던 관례였다. 원주민 노예 노동자들처럼 모든 한국인 노동자들도 나무괭이(어저귀를 자르는데 쓰이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일종의 낫)와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갈퀴를 하나씩 농장 측으로부터 받았다. 멕시코인 하나가 그들을 길가로 데리고 가서는 에네껜 잎을 어떻게 자르는지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두 시간이 지나자 농장 측에서는 한국인들을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자그마치만 주울이 달려 있어 날카로운 나무괭이 하나와 끈(굵은 밧줄) 한 뭉치를 주고는 커다란 나무괭이는 도로 회수해 갔다. 그리고 곧바로 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한인들을 데리고 가서는 각 한사람 당 에네껜 밭 한 고랑씩을 떠맡겼다. 이미 그곳에서는 원주민 노동자들이 에네껜 잎사귀를 자르고 있었다.

 

한인들은 원주민 노동자들처럼 일을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그들이 에네껜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데에 문제가 있었다. 계약주선자들은 에네껜이라는 식물이 대충 배추와 비슷한 것으로 노동일도 그저 단순하고 쉬운 일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인들은 원주민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까짓 일쯤이야 하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졌다. 또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었다. 그러나 막상 일에 뛰어들고 보니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단 며칠 사이에 낫을 익숙하게 사용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유진태씨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첸체(Chenche)농장뿐만 아니라, 모든 농장에서 한인들은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 한다. "어떤 농장들에서는 일하는 데 필요한 연장들을 주지 않는 바람에 더욱 고생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첸체 농장뿐만 아니라 다른 농장들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일에 숙달되지 않아 도저히 끝낼 수 없었습니다. 작업량은 자꾸만 늘어가 주어진 작업량 즉 오십 개의 잎사귀를 한 묶음으로 해서 하루에 삼십 묶음 치의 에네껜 잎들을 죽으라고 잘라야 했습니다. 보통 에네껜 하나는 오십 또는 백 개 정도 잎을 가지고 있는데 이중에서네 개 내지 열두 개의 잎사귀들을 자르게 되지요. 그러나 잎의 밑동 부분이 서로 꽉 붙어 있어서 잎의 끝 부분을 자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시 많은 나무 덤불에 손발이 긁히는 것은 다반사였고, 또 에네껜 잎에 무수히 솟아 있는 가시들, 어린 싹들에 찔려 온몸에 상처를 입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주어진 할당량 삼십 다발 분량을 묶을 노끈들이 우리에게 점점 쌓여만 갔습니다. 처음 며칠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그 노끈들을 되돌려 주려고 했지요. 그러나 그들은 손짓으로 "노오!" 하며 또 다른 삼십 다발 분량의 노끈을 주면서 그 일을 끝내야만 한다고 손짓으로 재촉했습니다. 원주민 노동자들은 이미 그들의 작업량을 다 끝마쳤기 때문에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밀린 작업량을 끝내기 위해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만 했습니다. 원주민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들은 우리들이 비록 일을 다 끝마치지 못했어도 원주민들에 하듯이 매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도주를 한다거나 농장의 책임자들에게 용납 못할 죄를 저질렀을 때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들의 요구는 점점 더해갔으며 가혹해졌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무리한 요구 앞에 일요일까지도 꾹 참고 일을 해야만 했지만 계속 쌓여만 가는 작업량으로부터 도저히 헤어 날 수 없었습니다. 해서 부인네들도 우리를 도우러 밭까지 나오게 됐지요. 우리들이 에네껜 잎을 자르고, 노끈으로 묶은 뒤, 그 다발들을 밭고랑에서 레일이 있는 곳까지 운반해 놓는 동안 그녀들은 에네껜 잎사귀의 가시들을 제거하는 등 일을 거들었습니다.

 

"물론 여자들이 금방 한꺼번에 밭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인들 중 하나가 일단 밭에 나오자, 그다음 날부터는 모든 부인네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우리들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경우가 우리들의 밀린 작업량을 메꾸는 데 도움은 됐지만 우리들 자식들의 교육에는 한마디로 몹쓸 짓이었죠. 우선 어머니가 자식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네껜 밭은 전갈, 땅거미, 모기, 진드기, 챠끼스떼스(Chaquistes), 쇠파리, 그리고 삐놀리요(pinolillos: 멕시코산의 붉고 작은 벌레)와 같은 해충이 득시글거렸고, 파충류 즉 여러 종류의 뱀들도 있었는데 주로 독이 있는 방울뱀들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기후를 들 수 있겠습니다. 특히 어린애들한테는 말도 못했지요. 뜨거운 햇볕을 가려 아이들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에네껜 밭에는 나무들이 없어 자연 그늘이 없었기 때문에 천상 우리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에네껜 줄기 끝에 커다란 자루나 모포를 걸쳐놓고 이 모포의 두 끝을 끈으로 묶은 다음 팽팽하게 잡아 당겨 에네껜 잎에다 다시 붙잡아 매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햇빛을 가릴 수 있었고, 벌레나 뱀들로부터 어린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도 혼자서 방어를 못할 때에는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지르곤 하여, 그들에게도 모포를 쳐주어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게 했습니다."

 

구십세 잡수신 공덕윤 선생께서 훗날 나에게 이야기하시길, 그 어린아이들 중에 나도 있었다고 하며 그때 나는 두세 달이 겨우 될까 말까 한 갓난아이였었다고 한다. 정말로 나에게 있어서 이분은 대단히 존경할만한 분이고 이분은 늘 내 마음속에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농장 구성원들 

 

농장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농장 총책임자 

1명 (Un Administrator) 

담당 관리인 1명 (Un Encargado) 

기계기사 1명 (Un Maquinista) 

보조기사 1명 (Un Ayudante de Maquinista) 

경리담당(비서 겸) 1명 (Un Pagador o Secretano) 

원예담당 1명 (Un Hortelano) 

화부 1명 (Un Fogonero) 

에네껜 섬유 포장 담당 1명 (Un Empacador de fibras) 

직영상점 지배인 1명 (Un Jefe de Tiendas de Raya) 

상점 점원 2명 (Dos Dependientes) 

십장 2 - 3명 (Dos o Tres Mayacoles (Cabos) 

사동 1명 (Un Mozo General)

 

농장 총책임자는 농장주(hacendado)의 유일한 대리인이었다. 그는 매주 농장에 와서는 이른 아침부터 그가 부재중 이루어진 작업성과를 담당 관리인과 함께 점검하곤 했다.

 

대부분의 농장들은 소나 돼지를 키우는 사육장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그곳에 한두 명의 목장 감독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가축의 수가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을 담당 관리인에게 보고했다. 심지어 수천 마리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부속 농장을 두 개씩 소유한 농장들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같은 농장 안의 에네껜 밭에서 자라는 목초들을 가축들 먹이로 주었다.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항은 총책임자에 의해 농장주에 의해 보고되었다.

 

담당 관리인의 농장과 부속농장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인사(人事)에 관한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총책임자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총책임자가 부재 시 진척된 모든 작업에 관한 사항을 그에게 보고했다.

 

기계 기사는 에네껜 분쇄기의 작동과 보수, 급유를 담당했다. 심지어 하루에 이십 만개까지 에네껜 잎사귀를 분쇄할 수 있는 기계를 소유한 농장들도 여러 군데 있었다. 기계 기사가 관장했던 사람들로서는, 짜서 나온 에네껜 섬유를 펼쳐 내는 사람, 그것을 포장하는 사람, 짜고 남은 껍질 및 그 찌꺼기를 버리는 사람, 무개화차로 에네껜 잎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보조 기사는 이 기계 기사 밑에 있었다.

 

경리담당 또는 서무담당자의 일상적으로 수행했던 업무는 매일같이 사무실에 나와 자리를 지키면서 십장이나 기계 기사로부터 보고를 접수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농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작업량을 장부에 기록하는 일이었다. 농장에서는 급료를 지불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돈 대신에 동으로 주조된 전표를 많이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이 전표들은 나중에 직영상점으로 고스란히 다시 회수됐다. 이 직영상점 지배인이 병이 나거나 자리를 비우게 될 때는 경리 담당이 상점 일을 임시로 돌봐 주기도 했다. 

 

원예담당은 특별히 두드러지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과수원을 돌보고 밭의 물을 메리다시에 있는 농장주에게 발송하거나 또는 수확물 중 여분이 있으면 밖에다 판매하는 등 그리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사람은 아니었다. 

 

직영상점의 지배인, 이 사람의 일이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시장 상인의 그것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상점의 일상 업무 중 물품이 떨어지거나 할 때 주인에게 그것을 청구하는 것과 주인에게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물건의 가격은 주인에 의해 결정되고 판매는 전표로서만 이루어졌는데, 이 전표들은 매일 경리담당자에게 다시 회수되었다. 경리담당자는 전표가 상점으로부터 얼마나 들어왔고 노동자한테 얼마나 나갔는가를 장부에 즉각 기록했다. 원주민(노예들)과 한국인(이방인) 노동자들에 깔린 외상을 매주 토요일 봉급 계산 시 공제했는데, 모든 노동자들은 이 빚으로부터 도저히 헤어 나올 길이 없었다.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한명 내지 두 명의 보조원(점원)들이 있었다.

 

십장(또는 경비원). 이들은 그들의 임무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고서 그들의 일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노동자들하고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왜냐하면 양측은 각각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장들은 주인의 편에 붙기 위한 의무감에서 그랬고, 노예들은 노예대로 설사 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일의 양을 줄이기 위해 요리 저리 십장들의 눈을 속이려고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에네껜 한 다발에는 50개의 잎사귀가 묶여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종종 사십 팔개 또는 사십 오개의 잎으로 한 다발을 채우곤 했다. 한편 30개 다발을 한 단위로 만들어야 했었는데 그들은 27다발, 또는 28다발로 속여서 건네주기도 했던 것이다. 간혹 가다 십장이 모르고 넘어가면 그냥 통과되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에 노예들은 그들끼리 통하는 말로 "금요일 날 독사를 잡아 죽였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만약 적발이라도 되는 날이면 그들은 몸서리치도록 매를 맞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몇몇 노동자들은 이 업무에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을 보냈다. 이들에게는 농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동태를 체크하는 비밀스러운 임무가 주어졌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한없이 충실한 사람으로 같은 인간인 농장 노동자들에게 비인간적으로 채찍질을 가했고, 나머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주인 곁에 항상 붙어 있었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그가 실제로 농장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형 집행인이었다.

 

에네껜 묶음들에서 잎들이 빠져 있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십장들은 각 다발의 절단면 쪽을 위로 세워놓고 청색 연필로 다발들을 쿡쿡 찔러보곤 했었다. 이것 말고도 십장들은 어떤 묶음들이 무개화차로 운반돼 분쇄기로 보내져야 하는지 화차 담당자들에게 알려 줄 의무가 있었다.

 

화차 담당자들의 일은 무개화차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대개 한 마리의 노새가 4천 내지 6천개의 잎을 적재한 이 화차를 끌었는데, 어떤 때는 화차 담당자들이 직접 끌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폭이 60cm 되는 이 화차의 레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그렇고 십장이 에네껜 잎을 베어온 사람에게 하루 노동량의 결과가 가(可)하다고 판정을 내리면 그는 에네껜 잎사귀의 총 숫자에 따라 500 또는 1,000이라는 숫자가 표시된 동으로 주조된 전표를 주었다. 이 전표를 받은 사람이 이 전표를 사무실에 가져가면 담당자는 임금 계정 난에 하루치 일한 분량의 숫자를 기입했다. 

 

사동은 주인집 본가에 머물면서 집안청소, 그리고 정원이 항상 말끔하도록 손질하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했다. 주인집 손님들이 찾아올 때는 십장이 와서 바쁜 일손을 덜어 주었다.

 

 

휴가

 

매년 농장주의 가족들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농장에 오곤 하였는데, 그때가 오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맞이하느라 야단법석을 피웠다. 이날에는 원주민들도 누더기 옷일지언정 걸쳐 입어야 했다. 이유는 쑬레스(tzules: 나이에 관계없이 농장주의 아들들을 이렇게 칭했음)라고 불리는 어린아이들이 농장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은 아랫도리만 겨우 가렸고 여자들은 '후스딴'(Just?)이라는 치마를 걸치긴 했으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벌거벗은 차림이었다. 다시 말해서 허리 위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 그대로의 차림이 당시 원주민들의 관습이었다.

 

우습지도 않은 것은 이 조그마한 아이들이 원주민들을 보기를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 양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고, 또 한국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인간이 아닌 마치 별종의 인간처럼 바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바로 '쑬레스'라고 불렸던 당시의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일주일에서 이주일 간의 방학을 즐기러 아버지의 농장에 왔는데, 그러면 부모들은 순전히 그들 자식들만을 위해 파티를 베풀어주곤 했다.

 

이 방학 축제 기간 중 취주 밴드의 음악과 그것에 맞춘 춤들, 부속목장 둘러보기, 송아지 투우 그리고 게임이 행해졌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 놀이는 아이들이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원주민이 행했다. 한국인들은 당연히 이 축제에 끼어들 수 없었다. 의사소통의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한국인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처럼 완전히 소외당했던 것이다.

 

 

결혼

 

결혼은 당사자들의 의사나 들러리에의 중매가 아니라 오로지 부모나 주인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신랑의 아버지가 8년, 10년 또는 20년 전 주인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결혼을 하고 그때부터 진 부채를 모두 청산했을 때라야만 아들을 결혼시킬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아들 또한 주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결혼할 수 있었는데, 이런 빚의 사슬 때문에 그들 사이에 노예 관계가 영구히 지속됐던 것이다. 지금도 이런 식의 채무 관계를 이용해 농장주가 결혼에 관여하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모든 원주민들은 주인의 뜻에 따라 결혼을 했다. 한편으로, 그들 모두가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주인의 은혜긴 은혜였던 것이다.

 

 

결혼식 축제

 

일단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대리인은 주인의 명을 받아 결혼식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식은 반드시 평상시 일할 때가 아닌 일요일에만 올릴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원주민들은 그날을 위해 성장을 하고 외출했다. 여자들은 '기삘(Guipil)'을 입고 일요일 나들이용의 샌들을 신고 어깨엔 쇼올을 걸쳤다. 남자들 역시 샌들을 신고 멋을 부리기 위해서 종려나무 잎으론 만들어진 모자를 썼다. 축제날 만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의상들로 그들은 한껏 돋보였다.

 

교회 신부는 종을 울려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농장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에게 미사를 거행했다. 농장의 책임자로부터 시작해서 최하층 원주민들까지도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으나 한인들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고, 그 종교 관습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물론 언어마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한국인 또한 이런 기독교 의식에는 흥미가 없어 아예 교회에 발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원주민들은 그들 고유의 전통적인 악기들을 가지고 나와서는 음악을 연주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춤을 추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혼식이 끝나고 교회를 빠져 나오면서 행해졌었다. 농장주들은 그들의 널찍한 집 마당에서 노예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원주민들은 춤출 장소로 들판의 공터를 마련했다. 한편 유까딴 식대로 만든 특유의 몰레(Mole)인, 삐빌우아(Pibilh? : Pibil = 화덕, h? = rotilla, 이 음식에 아치오떼(Achiote:얼핏 보기에 고춧가루처럼 보이는 짙은 고동색의 아나트 열매를 빻아 만든 가루)라는 향료를 곁들이면 맛이 있음), 빠보-삐빌(Pavo-Pibil : 화덕에 구운 칠면조 고기), 삐빌-께껜(Pibil-Quequen : 돼지고기 요리), 그리고 오르차타(Orchata : 쌀을 갈아서 만든 시원한 물), 초콜릿, 그리고 아똘레(역자 주 : 원래는 삶은 옥수수 낱알을 뜨거운 우유에 섞어서 만든 음료수이나 지금은 쌀로 만든 밥풀을 섞어 많이 마심) 음식 등이 축제를 위해 마련되었다. 모든 여자들이 동원되어 음식을 장만하였고 모여든 사람 모두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다시 농장으로 빠짐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누구도 전날의 흥겨운 축제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앞이나 겨우 가리고 또는 후스딴을 걸치고는 궁핍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매를 생각하면서 이전의 지긋지긋한 생활로 돌아갔다.

 

 

강간

 

신의 은총으로 우리 인간들은 세 개의 자연계, 즉 광물세계, 식물세계, 그리고 동물세계 속에 살고 있다. 특히 이 마지막 동물 세계는 다시 이성적인 존재(인간)와 사실상 사유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존재(동물)로 다시 세분될 수 있다. 동물들은 비록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처럼 그들의 힘을 남용하지 않는다. 인간은 반대로 자연적으로 주어진 힘을 함부로 쓰면서, 사회적인 목적 추구를 위해서는 비이성적인 존재(동물)들과는 달리 폭력에 의존, 온갖 종류의 죄악을 범한다. 다시 말해 동물은 단지 배가 고플 때만 남을 죽이며, 먹을 것이 없을 때만 다시 먹이를 찾으러 나서고, 뒷날의 포식을 위해 먹이를 남겨 놓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인간은 언제나 약탈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를 죽인다. 처음에는 굶주림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서로 죽이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야만적인 힘에 대한 괴사로 서로 호전적으로 싸우고 해친다. 내가 판단해볼 때 이런 행동은 이성을 지나치게 남용하는 것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행동하는 인간은, 권력을 손에 쥐게 될 때, 마치 내가 유까딴 농장에서 보고들은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손아귀에 가지고 있는 아주 미미한 권력이라 할지라도 그 권력을 최대로 이용하면서 그것들을 악용하고 남용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전장(前章)에서 결혼식에 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빠뜨렸었다. 많은 농장에서 신부 될 처녀가 결혼하려고 하면 우선 농장주나 농장관리인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즉 그들은 신부 될 처녀를 우선 먼저 건드렸다. 처녀의 부모나 신랑 될 남자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늘 일어났던 전통적인 관습으로 받아들였고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어떤 농장주나 '쑬레스'(또는 농장 집 아이들)는 이와는 반대로 농장관리인(또는 하인들)이 갖다 바치는 신선한 먹잇감을 거절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들 가문의 이름이나 피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농장 관리인들로부터 가장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알량한 특권을 이용해, 폭력으로 위협, 짐승 같은 본능으로 처녀들을 겁탈하곤 했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의사에 의한 육체적인 결합은 찬성하나 강간이라는 것은 본래가 힘이나 권력 면에서 서로 차이가 날 때 자행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나는 성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 유까딴 '반데라'(Bandera: 스페인어로 깃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음) 역중의 하나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 경우이다.

 

대부분의 농장에서는 마부 한 사람이 모는 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 즉 아침에는 메리다로 가는 기차를, 그리고 저녁에는 메리 다에서 오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소위 '깃발'역이라고 불리는 곳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곳으로, 마부들은 그곳에서 빨간 장대 깃발을 높이 세워서 기차를 멈추게 했다. 마부들은 여객 손님이 있는 경우에만 마차를 운행했다. 그들의 일이란 마차나 말을 손질하고 돌보는 것 외에 우편물, 화물, 짐, 여객 손님들을 아무 탈 없이 기차역까지 실어 나르거나 기차역에서 데려 오는 일이었다. 농장에서 역까지의 거리는 대개 2km에서 16km였다. 대부분의 기차역들은 시내에 있었고, 나머지 역들은 마을에 소재해 있었다. 기차는 일반 역들 사이로 자주 지나가긴 했으나 깃발로 기차를 서게 하는 역은 얼마 되지 않았다. 두 마리의 말이 끌며, 텐트 천으로 만들어진 차일을 가지고 있는 마차 안 바닥엔 에네껜 끈으로 만든 망이 깔려 있고, 그 위로 삼베 또는 '뽀쵸떼' (Pochote : 면과 유사한 것) 헝겊 기지의 방석이 놓인 좌석이 있는 이륜마차(Bolanes)가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폭이 60cm로 무개화차용의 철로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는 기차역까지 가기 위해서 이렇게 농장에서 소유하고 있는 이 마차를 이용했던 것이다.

 

 

병적인 것

 

이런 시절에는 마부도 특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깃발 역이 있었던 한 농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자가 마차에 올라탔는데 그녀만이 유일한 승객이었다. 그녀는 농장에 왔다가 다시 집으로 귀가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역에 일찍 도착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그녀를 태우고 온 마부가 그녀에게 치근덕거리고 결국 강제로 그녀를 겁탈해 버렸다. 복수심에 불탄 이 여자는 두 손으로 마부의 고환을 힘껏 잡아챘고 마부가 죽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때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다가왔고 그녀는 깃발로 신호를 해 기차를 멈춰 세웠다. 곧이어 기차에서 기관사 하나가 위엄을 풍기며 내려오자, 그 여자는 곧바로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기관사는 이 여자와 함께 마부의 시체를 들어 올려 기차에 옮기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열차 제동수로 하여금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시내에 위치한 다음 정거장에 기차가 도착하자 강간당한 여자와 시체를 내리게 하고는, 그들 모두를 당국에 인도했다. 그 여자로부터 전말을 전해들은 관리들은 정당방위였다고 결론을 짓고는 그녀를 석방했고 시체는 다시 농장으로 돌려보냈다. 그 죽은 마부를 그가 왔던 농장으로 다시 돌려보냈으니 얼마나 정당한 판결인지 모르겠다.

 

 

음식에 관하여

 

한인들이 멕시코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간, 쌀, 소금, 설탕, 그리고 기타 음식 재료들과 양념, 조미료 같은 것들이 제대로 배급된 것을 보면, 이민자들에게 급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계약상으로 그 조건들이 명시되어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모든 농장이 똑같이 이런 식으로 음식재료를 공급해준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형편없이 나빴던 것이다. 농장의 직영상점서 파는 것은 쌀이 아니라 옥수수였다. 그러나 옥수수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식생활 습관 때문에 입에 맞질 않았고 옥수수를 갈아서(Nixtamal) 또르띠야(Tortilla)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 새로운 환경에 금세 익숙해 질 수 없었기 때문에 한인들의 배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탈이 났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한국인 여자들에게 옥수수 낱알들을 가지고 어떻게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한인들은 옥수수를 그저 삶아서나 먹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멕시코 사람이면 누구나 사용하는 메따떼(다리가 3개 있는 장방형의 맷돌)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반대로 원주민 여자들은 옥수수나 콩을 메따떼(Metate)에 갈아 그것으로 부침개를 만들어 소금만 쳐서는 맛있게 먹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신 한 어른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 주셨다. 옥수수 음식을 먹고 난 한인들은 곧바로 배탈이 나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들은 농장 사무실에 환자로 처리, 보고되었다. 그러자 진료소 사람과 농장 관리인이 그들이 정말로 아픈지 아니면 꾀병을 부리는지 확인하려고 왔었다.

 

당시 농장들은 기본 응급치료만을 위한 몇몇 기본적인 필수의 약품만을 비치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요오드, 하제, 과산화수소, 거즈 그리고 몇몇 분말약과 같은 것들이었다.

 

한인들이 사는 집을 방문한 이 사람들은 초가집 안 귀퉁이에 만들어 놓은 부엌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부엌에 있는 그릇이라고 해봐야 양재기 몇 개, 불에 그슬리고 오래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냄비 몇 개뿐이었다. 한인들은 돌멩이를 세 개를 가지고 삼각형 모양으로 바닥에 쌓아 부뚜막을 만들었고 나뭇가지로 불을 지폈다. 이런 형태의 부엌은 현재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희한한 부엌을 신기한 듯 바라본 이 멕시코인들은 직영상점에 즉시 명령을 내려 한국인들에게 쌀을 공급하도록 해 한국인들의 식생활 사정은 개선되었다. 다시 말해 그때부터 한국인들의 음식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고, 다시 원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농장에서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한인들은 한결같이 고통을 겪었는데, 그것은 농장주 자신들이 계약상에 명시된 약속 사항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인들은 외견상 식생활에선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김치를 해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푸념을 해댔다. 이 김치라는 음식은 한국인들이 몇 세기를 두고 해먹은 기본 음식이었고, 지금도 역시 한국인의 식생활 관습에서는 빼 놀래야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쌀과 콩으로 만든 음식만으로는 도대체 배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어느 날 부인네 하나가 크게 마음먹고 마을 바깥의 에네껜 밭으로 나갔다. 그녀는 에네껜 잎들을 베고 난 밭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양껏 뜯어와서 삶아서 무쳐 먹었다. 그리고는 다른 부인네들한테도 왜 밖에 나가서 그 푸성귀들을 뜯어오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식 양념은 없었지만 한인들은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몇몇 농장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소나 돼지를 잡아서 원주민들이나 한국인들에게 거저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 양은 가족 수에 따라 각 가정에 250g에서 1kg까지 배급되었다. 한편 몇몇 다른 농장들에서는 고기를 팔았는데, 이런 곳에서는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고기를 살 수 있었다. 도살은 주로 토요일 새벽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행해졌는데 그럴 때면 전날 오후부터 고기를 배급할 테니 받아가라는 공지가 있었다. 그와는 달리 고기를 팔았던 농장에서는 사람을 하나 두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고기를 팔았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흐른 뒤, 한국 부인네들은 개 먹이로 던져주는 고기들을 빼앗기로 작정했다. 당시 도살 꾼은 소를 잡은 다음 가죽을 벗기고, 그 다음에 혀를 잘라 잘게 쪼갠 다음, 내장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간과 콩팥을 끄집어냈고 소머리와 꼬리, 다리들을 여러 부분으로 잘라서 모두 개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면 한국 부인네들은 우르르 몰려와서는 개들을 쫓아버린 뒤 개먹이로 던져준 고기 및 내장들을 주워서 모두 집으로 가지고 갔다. 이 광경을 본 도살 꾼은 그들에게도 똑같은 양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부터 한국 부인네들은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빽(Pek : 암캐들)이라는 이름으로고 불려졌다.

 

당시의 굶주림이란! 그 당시 우리들 남자보다 더 앞서 활동적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암캐라도 불렸던 부인들이었다. 이제 세상사람 모두는 개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금의 인간들은 개들이 먹던 내장 음식을 즐기고 한편 그것들은 비싸게 치는 요리이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농장들에서는 밭에 촐레스(Choles), 양배추, 또는 호배추들을 심었다. 그것들을 꼭 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 심었다. 왜냐하면 원예 담당자는 매일 아침 자랄 대로 다 자란 배춧잎들을 담장 밖으로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담장 밖을 지나던 한국 여인네들은 이 버려진 잎들을 보았고, 저마다 김치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서로들 줍기 위해 그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서로들 "길바닥에 버려진 것이면 어때요? 충분히 해 먹을 수 있는데. 여기 온 이후 김치를 담가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아요?" 하면서 먹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풀이나 배추 잎들을 깨끗이 쓸어갔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부자들이 버린 것을 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는 말은 딱 들어맞는다.

 

김치는 한국 음식에서는 빼놓으려야 빼놓을 수 없는 음식으로, 3,0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김치를 아무리 서구화된 후손들이 선조들의 식생활 관습을 비난한다 하더라도 한국인에게서 없앤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정말로 배고플 때는 딱딱한 빵이 문제겠는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람이 수박 껍질의 속살 흰 부분까지 먹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수박 껍질을 삶아 요리를 했고 그것으로 밥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에네껜 잎의 말랑말랑한 속살 부분도 팔팔 끓는 물속에 담갔다가 끄집어낸 다음 기름에 튀겨 먹거나 요리해 먹었다.

 

원주민들, 특히 농장에서 일했던 원주민들은 한국인들이 먹는 음식과 요리 방법을 보고는 자기들 음식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이 한국 음식을 먹을 줄 몰라서 이었거나 아니면 아마도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너무 풍부해서 그랬을는지도 모르겠다.

 

 

의복

 

유까딴 반도에 도착한 이래 한국인들은 고된 노동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입고 왔던 옷은 몇 달, 아니 몇 주도 못 가 다 떨어지고 걸레가 되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짚신을 신었고, 또 한국에서 가지고 온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즉 그들은 그 천들을 사용하여 손수 바느질한 뒤 꿰매어 긴 바지를 만들었고 윗도리는 셔츠 모양으로 소매를 길게 하고 앞에 단추를 달았다.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한국인들의 손이 엉망이 되었다. 특히 왼손은 에네껜 가시나 가시덤불에 찔리고 긁혀 피가 멈출 날이 하루도 없었다. 발 또한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들은 발가락부터 무릎까지 온통 가시가 엉겨 붙은 채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야 그들은 가시들을 빼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한편 한국인들은 항상 온몸을 가리고 일했다. 심지어 밀짚모자를 푹 쓰고 일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습 중에서 볼 수 있었던 부분이라고는 오로지 얼굴밖에 없었다.

 

반대로 원주민들은 누더기 조각으로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채 일을 했다. 온몸은 땡볕에 타 그을려 검은 구릿빛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그들이 매일 해 나갔던 일상의 일이었으나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한국인들은 원주민들을 경탄의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누군가가 일을 손쉽게 할 요량에 손을 감쌀 장갑을 하나 고안해 냈다.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헝겊과 천 조각으로 마치 각 반처럼 긴 양말을 만들었다. 이렇게 그것들을 손발에 끼고 일을 하다 보니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에네껜 잎을 자를 수 있었다. 게다가 건장한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고 보니 원주민들 보다 맡은 작업량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에네껜 밭에서 무개화차 레일이 있는 곳까지 에네껜 다발들을 옮겨 주는 등, 늙고 힘없는 한인들을 도와주었다. 이 일을 젊은 친구들이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에 고마워했고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에게 사례하려고 했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한인들은 곧바로 몸을 씻었고 입고 있던 옷들을 모두 갈아입었다. 옷이 땀으로 늘 젖어 있었고, 목욕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더위를 참을 수 없었다. 귀가 시간이 늦는 경우에는 목욕하자마자 밥을 먹고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왜냐하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질병들

 

농장에는 응급치료용 약 상자가 항상 비치돼 있거나 아니면 간이 진료소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고 또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은 우리들에게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우리들은 맡은 책임량을 완수하지 못해 사무실로부터 호출 당했을 때만 그곳에 갔을 뿐이었다. 이것 외에는 우리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약으로 손수 병을 치료했다. "준비성 있는 사람은 두 사람 몫을 한다." 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 말은 한국 부인네들에게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이들 부인네들은 그들이 떠날 때 가지고 온 짐꾸러미 속에 악들을 조심스럽게 간직하고 있다가 정말로 위급한 경우에만 그것들을 꺼내 사용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약은 이런 것들이다. 즉 말린 식물의 잎들, 나무껍질, 가축의 가죽이나 내장, 파충류 짐승들의 껍질이나 내장, 말린 물고기 껍질이나 뼈, 곤충으로는 거미와 거미줄, 전갈, 그리고 내가 듣지 못해 알지 못하는 곤충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말린 약재로서 한인들은 그것들을 달여서 먹었고 가볍게 배인 상처에 바르는 고약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들은 원주민들 또한 집에서 만든 약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들은 아주 간단한 것들로서 근본적인 치료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휴대용 약 상자가 비치된 사무실에 찾아가 그들로부터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한인들은 농장의 응급 처치실에는 결코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러자 농장 사람들은, 한인들이 그들 방식대로 병을 치료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치지도 않고 병도 안 걸리는 족속이라고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진태 선생, 공덕윤 선생, 이근하 선생에게서 들었다. 한편 그분들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툭하면 병에 걸렸었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때는 내가 열두 살, 즉 농장노동 계약이 끝난 지 칠 년째 되던 해였다.

 

 

한국인들의 폭동 - 채찍 한 대 때문에

 

어느 날 '첸체' 농장에서 한국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한국인 가족들과 젊은 총각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농장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다른 농장들보다 주의를 많이 끌었고 잘 조직되어 있었다. 농장의 길들은 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었고, 그 구획에 맞춰 돌담으로 둘러싸인 양철 지붕의 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을 농장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소도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농장에서처럼 우리들의 고된 노동일은 별반 차이가 없었으며 여기에서 일했던 한국인들 역시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

 

유까딴에 온 지 일 년 반이 지난 어느 날 한 젊은 한인이 도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농장의 경계선 끝에 다가갔다. 그는 이곳에서 웬 원주민 하나와 맞부딪쳤는데, 이 젊은이는 그가 그저 단순히 그쪽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철조망을 넘으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자 이 원주민이 그의 덜미를 붙잡고는 농장으로 그를 다시 끌고 왔다. 알고 보니 이 원주민은 바로 농장 경비원이었다. 그는 즉시 이 한국 청년을 대리인에게 넘겼다. 그러고 나서 이 대리인은 곧바로 사형 집행인을 호출했다. 이미 짐작으로 사건 경위를 알아차린 이 사형 집행인은 말없이 이 젊은이의 바지를 벗겼고 에네껜 잎 뭉치 위에 그를 눕혔다. 린치를 가하기 전 그는 신 오렌지와 소금을 미리 준비해 놓고는 이 가련한 젊은이의 볼기 위로 채찍질을 열대나 가하고는 그를 곧바로 지하 감옥에 처넣었다. 이 소식이 마치 화약의 도화선처럼 순식간에 한국인 거주 지구를 휩쓸었다. 분노한 한국인들 모두는 남녀 할 것 없이 몽둥이와 돌멩이, 그리고 기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저마다 손에 들고는 관리 사무소와 농장 주인집 본가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서는 잡아간 사람을 풀어주라고 소리 높여 외쳐댔다. 그러나 끝내 반응이 없자 그들은 대리인의 집과 농장 주인집에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 대리인은 생쥐처럼 열쇠 구멍을 통해 모든 사태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누군가가 "야! 저놈이 저리로 도망간다." 하고 소리쳤다. 한국인들은 그를 잡으려고 쫓아갔으나 결국 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 멕시코인이 아랫도리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헐레벌떡 도망가는 몰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곧바로 한인들은 감옥으로 달려가 문짝을 부숴 버리고 이 청년을 구출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전통 방식대로 그를 치료하였다. 이 젊은이는 두 가지 종류의 치료를 받았다. 다시 말해, 상처가 곪지 않도록 피범벅으로 부르튼 자리에 멕시코 식으로 신 오렌지 물을 짜서 발라준 뒤, 그 위에 소금을 뿌려 주었고, 상처가 빨리 아물기 위해 한국식으로 집에서 만든 말린 생선 뼛가루를 발라주었다.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닥쳐와도 싸워 이겨 나가리라 저마다 마음속에 다짐한 듯 모두가 말없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러 갈 시간이 됐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일하러 가라고 명령을 내리는 농장주 측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뒤에 농장주의 비서 하나가 한인 통역관과 사형 집행인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별다른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맞아 죽을까 봐 이내 줄행랑을 쳐버렸다. 당시에는 전화 시설이 별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가 아주 부족했었다. 예를 들면 농장들에서 지방 기차역까지, 이 기차역에서 메리다(Merida) 중앙역, 그리고 이 메리 다에서 다시 전화가 없는 농장주들을 위해 그들의 집에만 연결되는 선이 하나 있었다.

 

한인 부인들은 각자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고, 남정네들은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농장주가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둘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오후 기차를 타고 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농장주 (또는 고용주)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농장을 방문할까 했고, 그들 대신 농장의 총책임자가 일주일에 한 번씩 농장을 방문했었다. 어쨌든 우리 한인 모두는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농장주의 행동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들은 소규모의 진압군을 몰고 그가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갔다. 농장주의 행동은 한풀 꺾였다. 한인들 중에서, 스페인어가 제일 난 사람 하나가 농장 주인에게 다가가서는 사고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농장주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는 할 말이 없는지 우리보고 돌아가 일이나 하라고 일렀다.

 

이 사건이 터지고 사 오 일이 지난 후, 농장주를 대신해 경리담당을 겸했던 비서의 조치에 따라 대리인이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되었고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의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고 한국인들에 대한 채찍질도 사라졌다. 그리고 또 어느 누구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 사이엔 계약이 끝날 때까지 평화가 유지되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첸체' 농장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폭동사건 이후부터 다른 모든 농장에서도 한국인들에 대한 채찍질을 금했다. 이 기묘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농장주들이 서로 회합을 가지며 그들의 농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일들에 대해 의견을 서로 주고받는 사실이었다.

 

한국인 노동자와는 달리 원주민들은 최소한의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채찍으로 얻어터지기 일쑤였고 가능한 한 최대의 착취를 당했다. 우리들은 원주민 노동자들을 통해서 노예제도의 잔인성과 인간의 야만성이 어떤 것인지 매일같이 볼 수 있었다.

 

 

옥수수 밭

 

농장들에서는 노예들을 굶지 않을 정도의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해줄 수 있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농장주들은 매년 낡은 - 이미 수확이 끝났거나 아니면 거의 끝나 가는 - 다시 말해, 이제는 좋은 잎이 남아 있지 않은 에네껜 밭을 태울 필요가 있었다. 다음 해의 수확 때 두껍고 양질의 에네껜 앞을 거두기 위해 남아 있는 모든 잎을 제거했다. 그리고는 곧 휴경을 위해 밭을 갈도록 했고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연히 건조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조치해 놓은 다음, 농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동원해 밭을 태우게 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사방으로 퍼지게 한 다음, 각자 자기 위치에 있다가 한 사람이 "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이 신호에 맞춰 모두가 일제히 불을 질렀다. 불은 안쪽으로 타들어 가도록 했고 불꽃이 밖으로 튀어 옆의 다른 에네껜 밭으로 불이 옮아 붙지 않도록 모두가 주의를 기울였다. 불행하게도 바람이 거꾸로 불어 가까운 곳에 있는 밭에 불똥이 튀겨 불이 붙으면 모두가 나서서 불을 꺼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토지는 노예들에게 분배됐으며 여기에다 옥수수, 콩, 호박, 고추 및 다른 작물들을 심도록 할 수 있게 했다. 노예들은 조그만 초가집에 조그마한 헛간을 만들어 거기에다 일 년 동안 먹을 경작물들을 저장했다. 이 경작물 중 일부는 주인에게 갖다 바치고, 일부는 교회 신부에게,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농장의 농산물 담당에게 바쳐졌다. 이렇게 이들은 노예들로부터 상납을 받았다.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난 다음 남은 곡식들은 직영상점으로 가져가 팔았다.

 

한편 이들 원주민 노예들은 이렇게 생긴 땅에다 돼지를 사육했으며 마당에는 울타리를 치고 칠면조나 닭과 같은 가금류들을 길렀다. 돼지는 일 년에 한 번, 새끼가 많이 불어났을 때 잡았는데, 일부는 농장주 집사에게 바쳐야 했고 또 일부는 대리인에게 뜯겼다. 그러고 나서 남은 나머지 고기들은 일 년 내내 두고두고 먹게끔 육포로 만들었다. 육포로 만들 수 없는 것들은 기름에 튀겨서 버터로 만들었다. 이렇게 그들은 식품이 오래 묵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오래된 전통에 따라 한 부분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와 관련해 적절한 경구가 하나 있다. "경험은 옛것이라도 가치가 있지만 지식은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한편 한인들에게는 원주민들처럼 땅을 이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옥수수를 제외한 모든 곡물의 경작은 한국과는 딴판이었기 때문에 이런 원주민들의 농사 방법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생소하기만 할 뿐이었다.

 

 

계약의 만료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한국인들이 일하고 있었던 모든 농장은 대리인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다.

 

모든 농장에서는 한국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지 못하도록 했다. 농장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그곳에 그대로 머물고자 했던 사람들이 설사 있었더라도 모두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바깥세상은 그저 닫힌 세계였다. 도대체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들은 농장 바깥의 다른 세상에 대해서는 깜깜했고 심지어는 농장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게다가 스페인어는 물론이려니와 현지 원주민들과 한 번도 접촉할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야어는 더 더군다나 몰랐고 그들의 관습에 대해서도 무지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솔깃하고 그들을 따라나서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한인들 모두는 우선 메리다 시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그들 대부분은 운명과 한 번 맞부딪히기로 결정을 내리고는 사 년 동안 희생해서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움켜쥔 채 멕시코 전역으로 모험 길을 떠났다.

 

 

계약 알선업자

 

또다시 1,030명의 한국인들이 유까딴 주의 수도인 메리다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 여기에 발 디뎠을 때와는 달리 그렇게 어리벙벙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비록 여러 농장에 분산되어 사 년 동안 모두가 같은 고통을 겪긴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여기 생활에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 의견을 제시했지만, 각자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어떤 사람은 남의 집 머슴살이 일이라도 찾아봐야겠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모험인 줄은 알지만 다른 지방에 가서 새 생활을 개척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에 했던 에네껜 잎을 자르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다음에 할 계약은 계약 알선업자의 중개를 통해서 하자고 주장을 했다.

 

당시 이 계약 알선업자들은 사전에 이미 농장주들과 다양한 조건의 계약을 맺고 있었다. 그 계약조건은 다시 말해 베고 난 다음 가시를 제거한 에네껜 잎 천 개당 가격을 얼마로 할 것이며, 잎들을 묶어서, 그것들을 노새나 나귀, 그리고 마부까지 써서 무개화차의 레일이 놓여 있는 곳까지 가져가는 데는 얼마, 그리고 또 여기에다 노동자들이 농장에 머무는 동안 잠자리용 나무 침대(전통적인 한국 양식의 침상)를 빌려주고 한국인들의 주식인 쌀을 공급해 줄 때는 임금 계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다양했다. 이렇게 계약 알선업자들이 제시한 조건이 일단 농장주 측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면 피고용인 측과 농장주 측 사이에 계약이 체결됐다.

 

당시 한인들을 상대로 한 계약 알선업자들은 모두가 한인들이었다. 한국인들이 일했던 농장들의 수는 처음에는 22이었지만 지금은 더 많이 늘어났다. 농장주들은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한 번에 고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농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약 기간이 일 년으로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계약 알선업자 밑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자유로울 수 있었고 좋은 조건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박차고 나올 수 있었다. 여기에서 농장주들의 불만이 일어났다. 그들은 가급적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떠날 수 없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 중의 하나로 농장주들은 일 당량을 정해, 즉 에네껜 잎 천 개 단위로 양을 미리 정해 놓고 계약 알선업자와 협약을 맺었다. 농장주가 생각하기에 일손이 부족하다 싶으면 그들은 메리다 시로 나가 노동자들을 더 구해 오곤 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변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에게 더욱 유리한 조건을 내건 계약 알선업자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 서로 경쟁이 불었다.

 

 

각 주(州)에서 일어난 일

 

약 200세대쯤 되는 한인 가족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는 한꺼번에 농장을 나와 멕시코의 여러 주(州)로 흩어졌다. 깜뻬체(Campeche) 주의 깜뻬체(Campeche) 시, 따바스꼬(Tabasco) 주의 후론떼라(Frontera) 시, 멕시코시티, 누에보 레온(Nuevo Leon) 주의 몬떼레이(Monterrey), 따마울리빠스(Tamaulipas) 주의 땀삐꼬(Tampico) 시, 베라끄루스 주의 꼬앗싸꼬알꼬스(Coatzacoalcos) 시, 낀따나 로오(Quintana Roo) 주의 꾸유(Cuyu) 시, 그리고 예전 이름을 듣기는 들었지만 지금 기억할 수 없는 다른 여러 지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예를 들어 깜뻬체 지방에 간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자그마한 장사에 종사했고, 따바스꼬 주의 후론떼라에 간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했으며, 베라끄루스 주의 베라끄루스로 떠난 사람들은 노동자로 일했고, 베라끄루스 주의 꼬르도바 시로 간 사람들은 자영업을 시작했다. 멕시코시티로 간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일들을 했는데 대부분은 자영업에 종사했다. 누에보 레온 주의 몬떼레이로는 소수의 사람들이 갔다고 전해진다. 그 뒤로 그들 소식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을 그들이 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땀삐꼬 주의 땀삐꼬 시에 간 사람들은 노동일과 상업에 주로 종사했고, 베라끄루스 주의 꼬앗사꼬알꼬스로 간 사람들은 어업으로 삶을 꾸려 갔다. 이 꼬앗사꼬알꼬스는 유까딴 주를 제외한 여러 지방 중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었다. 그들은 어부 일로 성공하리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낀따나 로오 주의 꾸유 시로 떠난 두 가족은 이 개월 만에 다시 유까딴으로 되돌아 왔다. 마찬가지로 뒤에 꼬앗사꼬알꼬스에 갔던 사람들만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지방으로 떠났던 사람들도 대분분 다시 유까딴으로 돌아왔다.

 

 

한인 어부들의 고기 잡는 방식

 

한인 어부들은 폭이 한 10 에서 15m에 그리고 길이가 약 400m 되는 그물을 이용, 그 그물 아래 부분에 납덩이를 매달고, 위에는 콜크를 매달아 고기를 잡았다. 그들은 물고기떼(주로 농어들)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나가 물고기떼가 달아나지 않도록 열 척 또는 그 이상의 통나무배(Piraguas)들로 빙 둘러싼 뒤 그물을 챘다. 많은 어부들, 즉, 50명 이상에서 75명 정도의 어부들이 이 동원되어 서로 협력하면서 그물을 친 뒤, 그물 양쪽 끝을 동시에 잡아 당겨 물고기를 끌어 올렸다,

 

이 어부들 외에 열 명 이상의 잠수부들이 따로 있었다. 그들은 바늘과 실, 칼을 가지고 찢어진 그물을 기웠다. 즉 상어가 그물을 찢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상어 떼들이 몰려와 어부들을 공격 할 때, 이 잠수부들은 그들과 싸워 쫓아냈다. 상어는 언제나 그물에 구멍을 내곤 했다. 잠수부들은 상어를 그물 바깥쪽으로 내쫓을 때 그물 안에 있던 고기들이 덩달아 빠져나가지 않도록 항상 물속에서 대기, 감시해야만 했다. 이들은 어떤 과학적인 기계나 장비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혼자 싸웠다.

 

그물을 잡아당김에 따라 물고기들이 그물위로 올라왔다. 잡힌 생선들은 배 밑창의 창고로 옮겨졌다. 이 창고는 생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어획량은 보통 몇 톤씩 되었다.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동원돼 생선들을 크기별로 골라 정리해 놓고 내장들을 뺀 다음, 그 뒤 소금을 뿌렸다. 그 다음 어부들은 이 생선들을 상자에 포장, 그물이나 통나무배를 빌려 준 독점구매자에게 보냈다. 한국인 어부들의 고기 잡는 실력도 잘 모르면서도 장비들을 빌려 준 이 독점구매자는 머리가 꽤나 잘 돌아가는 친구였던 것 같다. 이 작자는 한국인들에게는 그저 연명이나 할 정도의 마진을 남겨 주고는 잡은 고기는 모두 다 가져갔던 것이다.

 

이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꼬앗사꼬알꼬스에 있던 한국인 어부들은 부산 출신의 포경선 어부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에서 고래를 잡았던 어부들은 이 일에는 아주 숙달된 전문가들이었다. 이민 온 초기 그들은 본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생전 해 보지 않은 부업과 같은 에네껜 잎을 자르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 이일은 참으로 괴롭고 힘들었다.

 

남편들 노동만 가지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으므로 부인들 역시 시장 안에 생선을 파는 노점을 차려 놓고는 소매로 내다 팔거나 생선을 토막 내 팔아 가계에 보탰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조금씩이나마 궁핍스런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인네들은 한인 어부들로부터 직접 생선을 구입해 팔면서 가게를 늘려 나갈 수 있었다. 그 당시 이 억척스런 부인네들과 경쟁할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식품을 자유롭게 구입함 

 

강제 계약에서 일단 풀려난 한인들은 유까딴 주의 수도(메리다 시)나 여러 도시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식료품이나 가재도구들을 구할 수 있었다. 한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생필품이 메리다시나 다른 도시들의 중국인 상점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농장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중국인 상점에서 동양 물건만 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부터 한인들은 중국인 상점에서 식료품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중국인들은 한인들하고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편 한인들은 그들만의 생일 풍습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영세를 받은 사람은 아직 없었었다.

 

능력 여하에 따라 사람들은 한인 사회 모든사람들, 또는 같은 농장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생일잔치에 초대했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단지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했는데, 이런 사람들 역시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 사람들을 많이 부르기도 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중국인들이 야채를 배달해 주었기 때문에 한인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야채를 구입할 수 있었다. 한인들은 이전 4년간의 농장 생활 중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다. 왜냐하면, 농장주들이 잡상인들이 농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일절 금했기 때문이었다. 한인들은 중국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유까딴 지방에 대규모 차이나타운(중국인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즉 채소 장사부터 시작해서, 세탁소, 식당, 식료품 상회, 백화점 및 유흥장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장사하고 있었다. 이런 중국인들이 밀집해 있던 곳에서는 중국 복권부터 식품, 약에 걸쳐 모든 것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백화점이나 식품점에 자주 들러 그저 식품들이나 약들을 샀다. 그것들은 한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중국말을 몰랐기 때문에 한자를 써서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물건을 사곤 했다. 왜냐하면 우리 한인들은 스페인어로 물어 보는 것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또 스페인어로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중국인들은 우리들을 중국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연필이나 쓸 것을 꺼내서는 우리에게 한문을 써 보였다. 그렇게 해서 한인들은 한자의 뜻을 통해 그들과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나라마다 발음은 상이하나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어 아직도 같은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세기 이상 전, 한 왕에 의해 창제되어 고유 문자를 갖게 된 한국처럼 다른 아시아 나라들도 그들만의 고유 문자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한자나 중국문화로부터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비록 수세기에 걸쳐 우리들이 한국문화에 의해 교육을 받았고 우리들이 한글을 공부했다고 해도 말이다. *(역주: 여기서 저자는 한국문화를 스페인어로 "JAN MUN"(한문) 그리고 한글을 "진서(CHIN SO)" 즉 한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을 번역하면 앞 뒤 문맥이 맞지 않는다. 즉 그 문장을 수정 없이 번역하면 "비록 수세기에 걸쳐 우리들이 한문(한국문화)을 통해 교육받았고 우리들이 한자를 공부했다고 해도 말이다.")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소식

 

이민 온 일 세대 분들은 한결같이 훌륭하신 어른들이었다. 한국이 일본에 합쳐진 것은 그분들이 강제 계약 즉, 굴레로부터 풀려난 지 겨우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이제 막 자유라는 것을 만끽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분들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고된 일을 했었다. 예전에는 강제노동의 속박에서 떨쳐 나오기 위해서, 지금은 꿈에도 목메는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할 무렵에 고국이 일본에 합병되었던 것이다.

 

 

불행한 소식

 

이미 메리다에 나와 있던 한인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와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메리다 시에 본부를 두고 유까딴 반도 전역을 관할할 한인회를 설치할 대사회적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이미 로스앤젤레스로부터 두 사람의 대표가 메리다로 향발했다. 한 분은 한인회 설립의 사명을 띤 방화중씨 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교회 건립을 위해 개신교 측에서 선출한 황사용씨였다.

 

한편 로스앤젤레스를 경유, 윤치호 한국 대사가 멕시코로 올 예정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의 국민회를 통해 합병 소식을 들었고 결국 그는 멕시코에 올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외교관 신분이 아닌 한낮 민간인 자격으로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메리다에 온 이 두 대표들은 도착 후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는 여러 동포들 중의 한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들 중 몇몇은 상업에 종사하거나 상점의 점원으로 일을 했었는데 그들은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파는 식품들은 순전히 한국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인들이 상업을 석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을 상대로 성공을 할 것만은 확실하다.

 

어찌됐건 방화중씨는 도착 다음날부터 한인들을 모이게 하고는 한인회 설립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농장들을 방문할 대표들을 임명했다. 이들 대표들은 방문하는 농장들마다 방문 취지를 알리고는 그곳에서 간단한 집회를 열어 그때까지도 한일합방의 불행한 소식을 모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그들이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들을 그대로 알렸다. 합방 소식을 듣자 농장의 모든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부인네들이나 어린이들 할 것 없이 모두들 울었는데, 특히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울었다.

 

사람들은 휴일인 일요일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이 다가오자 그들은 메리다 시로 떠났다. 이날 성인 남자들 대부분이 한인회 창립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메리다에 도착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대표의 예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총회를 구성하는 데에는 숫자적으로 아무런 문제점이 없었다. 이미 농장의 한인들로부터 사전에 지명되었던 각 농장의 대표들이 한인 이사회(La Mesa Directiva)의 임원들로 선출됐다.

 

그때 유까딴에서는 처음으로 정말로 대단한 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애 처음으로 집회라는 곳에 참석, 이렇게 잘 짜인 회의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착석한 사람들이나 서 있던 사람들 모두는 사회자가 회장 후보들을 호명하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기립하자 사회자가 "신광익 후보입니다."라고 소개를 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일어서자 "이종호씨 입니다."라고 사회자가 참석자들을 향해 두 후보를 소개했다. 투표 결과 회장에는 신광익씨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총무 후보로서 이명홍, 최종식 두 사람이 차례로 호명되었고, 투표결과 이명흥씨가 압도적 다수의 표로 당선되었다. 마지막으로 재무 담당을 뽑을 차례가 되었다. 투표에 들어가기 전 잠시 동안 휴식이 있었고 이어 김기창 후보와 이종호 후보가 겨룬 결과 이종호씨가 재무담당으로 선출됐다. 임원 선거가 끝나자 강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는 정말로 능력 있고 역량 있는 사람들이 뽑혔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