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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 소망 - 사랑 -----

🌺🌺 한국에서 사역했던 미국 선교사님들 2

by 최재민 선교사 2020. 10. 8.

 

 

우리 민족과 함께 울고 웃은 한국의 은인들이기도 하다. 

지난 8일 한국 기독교TV(CTS)와 기독실업인협회(CBMC)가 주최한

감사축제에 참석한 선교사 세명의 사연을 소개한다. 

 

 

 

돌세례 받아가며 선교 사역 

 

◇ 드와이트 린튼(81세·유진 벨 선교사의 외손자. 4대째 한국 선교) 

 

“나와 내 형 휴 린튼은 구한말 근대 교육과 의료사역을 펼쳤던 유진 벨 선교사의 외손자입니다. 1895년 시작된 유진 벨 선교사의 사역은 사위 윌리엄 린튼(1899~1913년)과 형님 휴 린튼, 4세대인 외증손자 스테판·존·짐 린튼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북한선교에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에는 치명적 병이 돌았는데 제 할머니도 선교사역 중 ‘어미빅 디슨트리’라는 병으로 돌아가셨죠. 또 전라도 나주 지역은 유교사상이 아주 강해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주민들이 돌을 던지기까지 해서 결국 목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신사참배 문제로 곤란을 겪었습니다. 우리 선교부에서는 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못하도록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 후 2년간 아버님께서 전주시나 경찰서에 몇 번씩 불려가 취조를 당했어요. 학교 문을 닫을 수 있다고 협박도 받았습니다. 

 

일본의 집요한 정책으로 인해 일부 선교사들은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수많은 선교사들을 세계 각국에 파송하는 한국 교회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한국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겁니다.” 

 

 

 

 

 

 

한국 위한 의료사역은 인생의 보람 

 

◇ 로베르타 라이스(91세·1957~1975년 한국에서 의료 사역) 

 

“젊은 시절 한국을 향해 선교의 열정을 품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감리교단에서는 여성에게 목사 직분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회자로서 선교 활동은 어렵다고 판단해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그 후 의사로서 한국에 파송됐습니다. 저는 세브란스병원과 이화여대병원 등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한국의 의료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특히 산모가 태아를 분만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파상풍이었습니다. 산파가 아이를 받을 때 청결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모든 국민들이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여성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습니다. 하루는 한 마을에 있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외곽지역 진료소를 찾아갔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가 급성맹장염에 걸려 있었죠. 

 

돌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아이의 엄마에게 ‘우리가 아이를 데려가 치료하고 집으로 데려오겠다, 돈은 낼 필요 없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아이 엄마는 ‘싫다, 계집아이일 뿐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게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그 시절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여성 학교 세운 것은 하나님의 뜻 

 

◇ 존 윌슨(91세·한국명 우요한. 1950년대 의료 사역) 

 

“아버님이 1908년 한국에서 병원 진료를 시작하셨습니다. 100년전 한국 사람들은 귀신이 배와 영혼에 들어와서 음식을 삼키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고 무당이 그것을 막대기로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당이 막대기를 비단으로 감아서 쌀을 입에 넣고 막대기를 배까지 밀어 넣으면 다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신이 배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느 날 그렇게 하다가 막대기가 부러졌습니다. 막대기를 삼킨 사람은 고통이 더 심했죠. 아버지는 수술로 그 막대기를 꺼냈습니다. 

 

한국 시골은 물이 좋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면 변소에서 우물로 오물이 흘러 사람들이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쉽게 질병에 걸렸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장내 기생충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소년이 토하고 매우 아파서 수술을 했는데 배에서 기생충 1천 마리가 나왔습니다. 

 

오염 때문에 전염병이 흔해서 많은 아이들이 일찍 죽었습니다. 2살까지 살아남으면 매우 운이 좋은 경우였죠. 당시에는 남존여비 사상도 강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여성 선교 학교를 시작하려고 하자 남자들은 ‘왜 여자들을 데려다가 가르치려느냐, 여자들은 그냥 밭일이나 가정 일만 하면 되지 교육은 필요없다’고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 학교는 광주를 시작으로 순천, 군산, 목포, 전주, 대구, 대전, 평양 등 모든 선교지부로 확대됐습니다.” 

 

 

- 천일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