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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

회상 :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노동 / 최병덕 - 2

by 최재민 선교사 2021. 1. 18.

 

 

- 전면에 이어

 

 

한인회 대표는 한 달 후 새로운 모임이 있음을 공지하면서 폐회를 선포했다. 간부로 뽑힌 세 사람의 선서식이 있었고, 이들에게 나머지 간부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자 '대한인국민회' 대표 자격으로 온 방화중씨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돌아갔다. 

 

다음 달에도 정기 총회가 열렸고, 마찬가지로 나머지 간부들이 임명되어, '이사회'의 빈자리는 모두 채워졌다. 우선 세 명의 집행부 이사들에 이어 아래 부서의 담당 간부들이 임명되었다. 

 

1. 감사실장 

2. 감사 

3. 언론 및 대외홍보 담당 

4. 교육 담당 

5. 사법 담당관 

6. 정책 담당관

 

한인회 잡행부와 행정부서 간부들에 대한 임명이 일단 끝나자 그들은 매월 1일 정기총회를 갖기로 원칙을 정했고, 곧이어 한인회의 정관 작성 작업에 들어갔다. 집행비나 기타 제 경비와 같은 건에 대해서는 잠정적인 세칙이 마련될 때까지 이사회가 따로 정기적으로 모여 결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사회의 모임은 매주 일요일 저녁이나 밤에 열리곤 했는데 집행부의 세 사람 간부를 제외한 나머지 임원들은 모두 무보수로 활동했었다. 게다가 이 분들은 매주 월요일을 희생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메리다에서 교외로 나가는 기차가 오후에만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늦은 시각이나 아니면 정오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사회 임원들은 그들의 일을 빠져 가면서까지 사명감에 하루도 빠짐없이 이사회 모임에 참석했다. 이 정관 작성을 위한 모임은 3주 동안 계속 됐다. 그런 다음 일반총회가 열렸다. 총회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임원들은 그들에게 작성된 정관을 낭독하고 승인을 요청했다. 

 

이사회는 주에 거주하는 약 900명의 한인들 숫자를 고려하여, 한인회관 사무실 임대비용, 세 사람의 집행부 임원들의 보수, 부수적으로 첨가되는 경비로서 가구, 문방구 및 기타 제비용들을 산출, 월 경비에 관한 의제를 총회에 상정했다. 

 

이사회 임원들은 이미 이 건을 확정해 놓고 난 다음이라 남은 것은 오직 총회의 결정뿐이었다. 재무담당이 일어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한인회 제경비를 산출하면서 꼭 필요하다는 생각되는 금액만 뽑았습니다. 그 내역을 보면 한 사람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해, 성인 900명이 있다고 치고 월 회비를 개인 당 1 뻬소로 산정, 한인회 경비를 월 900 뻬소로 책정했습니다. 한 사람 당 매달 1 뻬소씩을 회비로 내시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이 아니냐 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음과 같은 경비 내용을 참작하신다면, 1 뻬소는 여러분이 꼭 분담해야 할 금액이라고 생각됩니다." 

 

1. 한인 회관 임대 비용

50 뻬소

2. 집행부 임원 3 사람의 월급 (하루 2빼소 x 30, 60뻬소 x 3 사람)

180 뻬소

3. 사무용품, 사무실 집기류, 전기세 및 기타 비용

30 뻬소

4. 조선 적십자에 낼 비용 (총 경비의 5%);

45 뻬소

5. 대한국민회 본부 유지를 위한 협력 기금 및 대한 독립운동 지원금(총 수입의 50%);

450 뻬소

6. 총회 개최비, 대표단 비용 그리고 기타 예상되는 이외의 비용

145 뻬소

합계

900 뻬소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제 1항과 제 6항은 재조정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유보 하에 나머지 사항들은 일단 승인했다. 1항인 임대 비용에 대해서는 임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임대비용이 너무 높게 책정됐고, 6항, 즉 사회봉사 목적으로 쓰여질 한인회 기금은 자세한 설명 없이 매달 지출될 금액만 과다하게 책정된 것이 아니냐 하는 중론들이었다. 한편 농장을 방문할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 보고 폐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하나 일어나더니 "우리가 토의해야 할 것은 월 회비를 어떻게 걷느냐 하는 것인데, 제 생각엔 각 농장마다 대표를 임명해서 그 사람들이 농장에 거주하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매월 메리다 본부로 발송하든지 아니면 직접 재무 담당한테 가지고 와서 전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회원들이 사망하거나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처럼 기타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지출금에 대해서는 비축해 놓은 기금에서 꺼내 쓸 것이 아니라 특별 경비를 따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말했다. 이 마지막 제안은 총회에서 가결됐고, 첫 번째 임대비용 건에 대해서는 행정 담당이 책임지고 결정하도록 합의를 보았다.

 

 

새로운 계약을 한 한인 농장노동자의 평균 급여

 

1910년에서 1911년, 당시 원주민 인디오 노동자들이 받았던 급여는 일당 1뻬소를 채 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일당 1뻬소 정도를 받으면 좋은 보수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적으로 일급 75쎈따보 정도를 받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강제 계약으로부터 풀려 나온 한인들은 한 계약알선업자의 감독 아래 원주민과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그들보다도 더 많은 급료를 받았다. 제일 적게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1뻬소에서 2뻬소 사이의 일당을 받았으니 급료 면에선 그들보다 대우가 훨씬 좋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더 적극적으로 일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들은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일을 했으며 어떤 때는 비를 맞아 가면서 일을 했었다. 한인들은 비를 맞으며 일을 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몸이 흠뻑 젖은 채 시원한 공기 아래서 보다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에 젖은 옷들은 몸에서 발산되는 뜨거운 열기로 말랐다가 다시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렇게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했었다.

 

식비는 1주일에 1뻬소를 넘지 않았다. 대개 50쎈따보 정도 들었다. 물론 이 경우는 밥하고 김치만 먹는 조악한 한국 음식의 경우에서였다. 고기는 일주일 가야 한번이나 먹었을까 그럴 정도였다. 메리다 시에서는 농장에서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음식에 하루 50쎈따보씩이나 들어갔는데 이 비싼 식비는 총 가계 지출에서 반 정도를 차지해 모든 가정이 견뎌낼 수 없었다.

 

 

교회 

 

메리다에 도착한 이래 황사용씨는 한인회와는 별도로 기독교 복음을 전도하면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업무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여러 농장들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국인 가정집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효과가 있어 농장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기독교 신자로 바뀌게 되었다. 그의 복음 설교가 얼마나 순식간에 확 퍼졌던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농장에 모여 예배를 볼 정도가 되었다. 농장주들이 장소(초가집)를 제공해 주지 않을 때에는 각 가정집을 돌아가며 예배를 보았다. 이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예배를 빠짐없이 드렸다. 즉 매주 일요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수요일 저녁 예배 이렇게 해서 일주일에 세 번만큼은 꼭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기독교 축일이 다가오면 한인들은 밤을 세워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배를 드렸고, 거기에 온 어린아이들 모두에게 -원주민 꼬마 녀석들이건 누구 건 할 것 없이- 마련한 과자들을 나누어주었다. 메리다 시의 중국인 상회에서 사온 초롱불과 촛불들로 예배드릴 초가집(교회) 주위의 길을 환히 밝혔는데 여기 원주민 어린아이들도 호기심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런 모임이 농장에서 자주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행사가 벌어지면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밤 11시가 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주최 측 사람들은 참석자들 모두를, 설사 무슨 잔치인지 모른 채 찾아온 사람들 모두를 따뜻한 미소로서 반가이 맞아들였고, 준비한 빵(달콤한 카스테라빵) 및 초콜릿을 손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농장의 예배 모임을 주재했던 사람들 중에서 목사인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는 오직 신앙의 이름 아래 모인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예배 순서

 

1. 기도와 함께 예배 시작 

2. 찬송가 합창 

3.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주기도문을 낭독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 모두들 일어서서 묵상 

4. 성경 봉독 

5. 성경 봉독에 다른 해설 및 설교 

6. "목사", 그리고 목사를 보좌하는 사람, 또는 신자라 불리는 형제자매들의 기도 

7. 찬송가 합창 

8. 교회 유지를 위한 헌금 

9. 찬송가로 예배 종료 

10. 목사님의 예배 종료 기도

 

 

예배 시간 

 

일요일: 오전 8시, 오후 7시 

수요일: 오후 7시 

예배 소요 시간: 한 시간

 

 

배교자들

 

농장에 있던 한국인들은 그들의 형제 신도들과 예배드릴 목적이라면 장소가 어디가 됐건 자주 모이곤 했다. 어떤 농장주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초가집을 빌려주었는데 그 집에서 한국인들은 종교, 문화, 사회적 모임을 갖곤 했다. 그러나 농장주들이 한국인들에게 베푼 특별 배려는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원주민들에게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고 아예 금지되었다. 한국인 계약알선 업자가 예배드릴 장소로 전에 봐 두었던 초가집을 얻고자 농장주들에게 간청도 하고 무진 애를 썼지만 대부분의 농장주들은 이기심에서인지 부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는지 한국인들에게 초가집을 대여해 주는 것을 꺼려했다. 대부분의 초가집들은 목초와 야자수 잎으로 덮은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 벽은 진흙도 바르지도 않고 그저 밀림에서 자라는 관목 가지로 가느다란 살을 만들어 엮었는데 이런 집들은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이 천천히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훼손됐고 부서져 갔다. 한인들은 농장주들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갖는 데 대한 시기심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 체계를 받아들임에 따라 언젠가는 이 잠자는 노예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하는 그들만의 두려움 때문에 라고 해석을 했다. 

 

유까딴에 있던 한인 교회는 주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교회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유까딴 주 메리다의 개신교회 측에 등록되어 주 교회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주 교회에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또 한인들 역시 스페인어를 하지 못해 한인 교회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 교회는 결국 한인 교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자치권을 부여했다. 한편 주 교회는 한인 교회를 메리다 시 교회 산하에 있는 예외적인 경우로 간주, 한인 교회는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들어온 한국인 선교사들이 늘어갔다. 이들 전도사들은 오로지 한인들의 선교에만 전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페인어나 마야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그리스도 재림파 교회의 선교사들, 그리고 안식 교회파,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쉬는, 선교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1923년에서 1924년 사이 이들 선교사들이 목회 활동을 시작한 이래 개신교 신자들 대부분은 안식교로 개종했다. 심지어는 개신교 전도사까지 안식교로 개종, 그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내 판단으로는 각파의 교리가 이렇고 저렇고 따지기 전에 기독교 교리의 본질은 선(善)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기존 종교든지 아니면 그것의 분파든지 그 의식 절차는 순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종교의 본질은 이성에 근거해 평가돼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다.

 

 

유까딴의 한인들 교육

 

유까딴한인회 교육담당위원회 사람들은 총회에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교육 분야의 기능을 강화하자고 역설했다. 그들은 부연 설명을 하면서 농장의 각 조(租) 대표들의 의견을 취합해 어린아이들과 문맹인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치자고 총회에 제안했다. 교육 문제는 한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사회 간부진들은 회의에서 숙고한 뒤, 아무런 비판이나 반론 없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첫째 문제는 한국어를 가르칠 자격 있는 교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교사들에게도 어느 정도 응분의 보수를 지불해야 됐기 때문에 학생 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두 가지 문제는 교육 담당 위원들이 해결하도록 그들에게 일임되었다. 여기에 따라 자신들의 권한을 이용, 아무런 간섭 없이 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한인학교 교사들 구함 

 

교육담당 위원들은 농장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방문해서, 모임을 주선한 뒤 명예 교사나 임시 교사들을 뽑았다. 그런 다음 한인회 농장 조직이 해체되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교사가 부재중일 때를 대비, 교육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해 각 농장에서 능력이 있다고 보이는, 다시 말해 농장 사람들의 투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들을 이미 임명된 선생들 대타로 뽑았다. 

 

한편 메리다 시에서는 한인회 총무직을 맡은 사람 자신이 동시에 교사직을 겸임하면서 시내에 거주하는 한인 자녀들을 가르쳤다. 이런 이유로 그곳에서는 농장과는 달리 선생 구하는 문제로 급작스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을 선생에게 맡기면서 수업료 조로 과외 돈을 이 선생에게 지불했다. 물론 이 교사는 한인회 총무로서 따로 봉급을 받았다. 메리다에는 1910년 초부터 1912년 기간 동안 이렇게 겸직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리다의 경우 학생들이 한둘씩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장들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 없이 학생들을 계속 가르칠 수 있었다.

 

 

교육 제도 

 

한국은 전통적으로 천자문(千字文) -다시 말해 천여 자로 쓰여진 (文化)에 관한 책- 이라 불리는 책을 통해 모든 학교 교육을 시작했고 발전시켜 나갔다. 이 천자문이라는 것은 한국 문자가 아닌 중국어(漢字)로 된 책이었다. 한자(漢字)는 글자 하나가 단어 하나를 이루고 여러 뜻을 함축하고 있는 글자로 중국어나 한국어로 발음될 때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런 차이가 바로 두 민족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하더라도 의사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종족 면에서 한국인은 중국인과 닮은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한국은 오래 전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도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중국 문자를 '한문'이라고 부르고 한국 문자를 '한글'이라고 부른다. 한글은 지금으로부터 약 5세기 전 한국의 한 군주에 의해서 창제되었으며 24개의 철자로 구성돼 있다. 독특한 것은 형용사가 단독으로 사용되었거나 사용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형용사가 명사 앞뒤에 붙어서 고유한 단독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한국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한글 사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한국을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만 한국어가 쓰여졌다. 즉 한국을 벗어나 해외로 이주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다. 

 

한국인들 거의가 글을 쓸 때 한문의 명사 술어에 한글 토를 붙여서 쓰고 있고 대부분의 인쇄물 역시 한글로 길게 풀어쓴 말을 간략한 한문 용어로 바꿔서 문장을 매끄럽게 한다. 즉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 하더라도 한문을 배우지 않고는 어떤 문장에서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천자문을 새롭게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어렸을 때 천자문을 배웠는데 지금은 한 글자도 기억할 수 없다. 어찌 됐건 천자문은 동양 학문의 기본서 라고 말할 수 있다. 

 

농장에 있던 한인 집단 사회는 늘 불안정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곳 저곳 학교를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즉, 어떤 농장에서는 선생이 농장을 떠나서 또 어떤 곳에서는 학생이 없어 가르치는 일을 계속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배울 장소가 있기만 하면 어디든지 가서 열심히 배웠다. 선생님들은 한국 전통에 따라 우리들을 엄하게 가르치셨다. 선생님들은 쉬실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들은 새벽 4시부터, 어떤 경우에는 새벽 2시부터 저녁 5시 또는 6시까지 하루 온종일 중노동을 하고 난 다음 학생들에게 2시간 정도 글을 가르치셨는데 이런 몸에 수업 준비까지 하시랴 그야말로 휴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하루에 천자문 여덟 글자를 배웠는데 그것들을 매일같이 암기했고 획 하나 하나를 틀리지 않고 써야만 했다. 만약 어떤 학생이 한자(漢字) 하나를 쓰면서 획을 빠뜨리게 되면 이 가련한 친구는 빼먹은 획수만큼 선생님한테 종아리를 맞았다. 글자 하나에서 10획이 빠지면 10대, 획을 물경 27개씩이나 빠뜨려 먹게 되면 선생님께서는 한획 한 획씩 세워서 또박또박 한자를 쓰신 다음 그 숫자만큼 에누리 없이 종아리를 때리셨다. 그러나 매를 드셔야 할 경우가 생겨도 선생님은 그렇게 심하게 체벌을 가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만큼 우리들은 철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망나니 같은 녀석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학생들을 벌주는 방법은 폭이 대략 10cm, 길이가 20cm, 거기다 높이가 10cm쯤 되는 나무토막 위에 아이를 세워 놓고 무릎까지 바지를 치켜 올리게 한 다음 등나무로 가늘게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거였다. 선생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에서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회초리를 드셨는데, 회초리를 맞는 학생이나 가하는 선생 쪽이나 서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비록 이런 체벌 방법이 한국에서는 보통이고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손 치더라도 종아리를 맞는 학생은 다른 동무들 면전에서 창피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몇몇 농장에서는 선생님이 둘씩 있었는데 한 분은 산수를, 다른 한 분은 어학을 가르치셨다. 산수 공부는 한 시간으로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어학 공부는 2시간 배당되어 밤 7시부터 9시까지 행해졌다. 이렇게 수업을 하신 다음 선생님들께서는 다음날 아침 새벽 2시나 4시 사이에 일터로 나가셨다. 

 

이와는 달리 메리다의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모두 농장에서처럼 어려움을 별로 겪지 않았다. 첫째 이유로 수업 시간이 매일 8시간이나 되었지만 규칙적이어서 밤을 새울 필요가 없었고 두 번째 이유로는 학생들이 한국어 알파벳, 즉 한글만 공부하면 됐지 어려운 한문을 따로 공부해 고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8살에서부터 12살까지인 어린아이들이었고 또 선생님께서는 메리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부모를 둔 이 꼬마 녀석들을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멕시코 혁명과 한국인들 

 

한국이 일본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젊은 청년들은 일본과 한판 싸우고 싶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들은 곧 이 멕시코 땅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이런 허탈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때마침 멕시코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려 왔던 것이다. 멕시코 남부 및 남동쪽에서 혁명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들 젊은이들은 곧 지원병으로 나섰다. 

 

부양할 책임도 없고 독신인 데다가 이 유까딴 반도에서 그를 위해 울어줄, 아니면 그가 울어줄 만한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혈혈단신인, 20살에서 25살 사이의 열혈청년 25명이 이근영 선생 지휘하에 모험 길에 나섰다. 이근영 선생은 한국어로 '숭무학교'라는 군사 학교를 세우신 분인데, 이 학교는 청년들이 혁명전쟁에 참가하기로 하자, 인원이 부족하여 그 군사적 기능을 오래 존속시킬 수 없었다. 청년들을 대표해 선생께서는 곳곳에 설치된 혁명군 징병 사무소를 방문하기 위해 메리다로 갔다. 그는 거기서 어렵지 않게 한 징병소를 찾아서 이 젊은이들 모두를 혁명군에 입대시킬 수 있었다. 처음, 이들 젊은이들은 에네껜 자르는 일에서 벗어나고 멕시코 여러 지방을 두루 견문할 수 있으리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가졌겠지만 그들은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었던 것 같다. 뒤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들은 과테말라로 갔다고 하는데, 그 소식 뒤로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필자는 꼬앗사꼬알꼬스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이근영 씨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로 이 분은 한인 어부 집단의 우두머리 격으로 일했다고 한다. 나는 이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나와 이분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의구심이라 할까, 아니면 그분 눈에 내가 바보처럼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실제 그랬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어딘가 모자라거나 "어수룩한" 남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인 이유는 아마도 살아오면서 내가 영리하거나 이기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보다는 틈나는 대로 가축이나 돌보는 한마디로 촌놈 같은 존재였기 때문일 거로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이근영 선생과 한마디 대화를 나누어 볼 기회가 없었다. 1931년 나는 일거리를 찾아 베라끄루스주 아구아둘세(Agua Dulce)에 갔다. 거기서 일한 지 몇 달 뒤에 조씨 성을 가진 한국인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멕시코 엘 아길라(El Aguila) 석유회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고 있었고 나 역시 같은 회사에서 밧데리 계측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언젠가 그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멕시코 혁명에 참가해 그가 겪었던 모험담이 화제에 올랐다. 그는 나에게 여러 개의 계급장을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는 소령 계급장도 있었다. 그는 이 소령 진급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는 그가 마음에 들어 했던 까란사(Carranza) 군대에 속해 그가 겪었던 여러 전투장면을 몇 번이고 나에게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에 의해 멕시코 군대내에서 소령의 지위까지 올라간 사실에 대해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필자가 혁명에 참가한 다른 한국인들에 대해서 물어 보자 그는 두세 사람의 한국인이 장교까지 진급한 사실은 알고 있는데 이것 말고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들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이 우연한 만남 뒤로는 서로가 다시 볼 기회가 없었고, 혁명에 관한 이야기도 더 들을 수 없었다. 

 

그러는 한편, 유까딴에서는 구한국군대에서 대장을 했었다고 하는 한 교관 선생의 지휘하에 군사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훈련에서는 무기대용으로 실제 총 대신에 목총을 만들어 연습하고 있었다. 그 당시, 무기 구입이 금지되어서가 아니라 모두들 가난해 무기를 구입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장년, 심지어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적들과 싸워 언젠가 조국을 해방시킬 일념으로 군사 훈련에 열심히 참가했다. 정말로 그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유를 갈망했다.

 

 

오아하까 제당 공장과의 또 다른 계약 

 

강제계약에서 풀려난 지 이제 겨우 3년, 그리고 한인회를 조직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3년 기간에 한인들은 노동과 생활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선가 새로운 계약모집 광고가 갑자기 나붙었다. 이번에는 사탕수수를 자르는 일, 그리고 제당 공장과 관련된 여러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계약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계약알선업자들은 전만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들이 계약알선업자로부터 속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50명 정도 되는 한인들만이 계약에 응모, 제당 공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가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때는 이미 7살이 된 나도 그때 그들과 함께 나섰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때 일은 나에게 있어 꿈같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때부터 나는 내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제공된 집은 양철지붕을 한 나무 판잣집이었다. 같은 나무판자로 바닥을 깐 집은 마치 기둥 위에 올라탄 것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어 언제든지 옮길 수 있었다. 변소는 마치 죽은 사람들을 집어넣는 관처럼 긴 널빤지로 상자처럼 만든 다음 가운데에 나무 판자를 또 이등분했다. 그리고 그 위에 널빤지를 각각 대어 두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매 24시간마다 분뇨를 버린 뒤 곧바로 석회를 뿌려 표백한 뒤 다시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매일 용변문제를 처리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몰려 살던 곳은 민족별로 되어있었다. 다시 말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멕시코인 그리고 기타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섞여서 살지 않았고 자신들의 구역 안에서 자국민들끼리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각 민족집단은 저마다 커다란 상점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많은 종업원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 나는 일본인, 멕시코인 및 미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미국인들(다시 말해 이 양키들)을 먼발치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들의 주택은 가장 고지대에 있었고 가장 부자촌이었다. 오후가 되면 국적별로 나뉘어진 구역마다, 식품이나 과자류를 파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상점 주위로 병영이 있었고 군인들의 모습은 많이 보였다. 

 

주택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사탕수수 압착장이 있었다. 이 고장은 압착기가 설치된 커다란 집이었다. 바깥에는 철책을 두른 무개화차가 사탕수수를 가득 싣고서 들락날락했는데 그것으로 보아 제당 공장으로 사탕수수를 가져가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아버지는 다른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들판으로 나가시곤 했는데, 매일 늦게 돌아오시는 것으로 보아 사탕수수를 자르러 가셨던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의자가 많이 놓여진 집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이 집으로 남녀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집안에는 단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곁으로 웬 어른 한 분이 서 계셨다. 이 분은 개신교 목사로 전도 활동을 펼쳤던 신광익 선생으로 여기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모여 기도를 올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한편 이 집은 아침저녁 예배가 끝난 후에는 학교로 바뀌어 많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공부를 하러 오곤 했다. 필자 역시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공부하러 갔던 것은 아니고 몰래 들어갔었는데, 그때 선생인 신광익 목사한테 들켜 야단맞은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어느 집 앞을 급히 지나가고 있다가 집 아래에 있는 기둥 하나에 사람 하나가 묶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계약알선업자였던 이창태씨였다. 동업자였던 황명주씨는 어디론가 도망을 갔고 이씨만 혼자 잡혀 계약한 사람들로부터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뒤 이들 둘은 계약알선 업무 일에서 손을 떼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들 두 사람은 제당 공장의 관리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고 하는데 그들의 상관은 작업반의 책임자들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잘랐고 몇몇 사람들은 사탕수수 압착장에서 일을 했다. 부인들도 압착장에 나갔는데 그들 중 하나가 한지 며칠 안 되어 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일이 발생했다. 그 여자는 서병두씨의 부인으로 사탕수수 짜는 일에 고용돼서 일하다가 압착기 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사고로 죽은 그녀의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왔는데 거기에 같이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관습을 보면 남녀간에 서로 질투심과 복종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장례식에 따라가서 안 사실인데 남녀가 유별해서인지 한자리에 서로 어울려 있질 않고 따로 떨어져 있었다. 특히 결혼한 부인인 경우에는 사람들이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것 같다. 

 

제당 공장의 묘지는 마을에서 가까운, 특히 집들의 창문을 통해서 훤히 보이는 언덕 기슭 가까이에 있었다. 다음날 오후, 한 집에 남자들만의 모임이 있었다. 이 집은 한인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제당 공장 측에서 제공한 집이었는데 여기서 한인들은 사회, 문화적 필요성 그리고 기타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는 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부인네와 린치를 당하고 도망간 사람 -나 역시 그 뒤로 이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에 대해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모임은 유진태씨가 주재했다. 모임이 끝나면 사람들은 여기서 예배를 자주 드렸고 또 어린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 모임이 있고 며칠 뒤 사람들은 소풍 계획을 세웠다. 일요일, 주일예배(개신교의 주님 찬양 예배)가 끝난 뒤 아침 일찍 제당 공장에서 약 4km 떨어진 강변으로 떠나기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신선한 가을을 만끽하고 즐거운 소풍날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50명분 이상의 점심 그리고 간식을 준비하였다. 모두들 각자의 일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으므로 이렇게 한자리에 자주 모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들 유쾌한 기분에 한 마음이 되어 합창을 하면서 걸어서 강가에 도착했다. 거기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멱이나 감자고 서로 충동질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작정을 했는지 곧바로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멱을 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중 한사람이 소용돌이(강의 눈)에 휘감겨 허우적거렸고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 소용돌이란 수면에서 보여지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 만한 특별한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속으로 꺼졌다 나왔다 서너 차례 자맥질을 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들 살아날지 어떨지 놀라서 경황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구조할 방법이 없어 그 사람은 결국 익사하고 말았다. 몇몇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리려고 제당 공장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뒤,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한인사회의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익사 소식을 듣고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물에 떠오른 시체를 지체없이 끄집어냈고 다음날 장례식을 치렀다. 이렇게 시체 인양부터 장례식까지 모든 동포들이 자리를 함께 했는데 죽은 사람은 미혼의 젊은이로서 성품이 곱고 친절해 사람들 모두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령

 

이 이야기는 내가 이전에도 들어 알고 있었고, 한편 내가 베라끄루스 주 아구아둘세에서 일을 했을 때 동료였던 한 친구가 뒷날 다시 전해 준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당 공장에 필요한 물을 끌어올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이란 새벽 1시에 일어나 1시간 가량 걸어서 2시쯤에 강에 도착, 펌프질을 시작하여 물탱크에 물을 채워 놓는 단조로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는 펌프에 들어갈 가솔린을 잊어버리고 가지고 오질 않았다. 그는 곧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환하게 비추는 달 아래로 길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 경계 표시를 나타내 주는 이정표의 km 숫자까지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때 이 친구는 멀리 떨어진 이정표 하나를 보았고 그 위로 웬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펌프용 유동액을 가지고 제 시간에 돌아올 생각에 급히 서둘러 가느라 특별한 주의를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그가 발길을 재촉, 얼마만큼 가자 먼저 번에 보았던 같은 사람이 다른 이정표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저 사람이 내 앞을 지나쳐 간 것을 분명히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여기 또 앉아 있는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검은 물체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볼 수 없었다. 그를 지나쳐 얼마 가지 않았는데 또다시 그 물체가 이 친구 앞에 나타났다. 다시 전처럼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지만 이제는 우뚝 서 있는 검은 물체를 보고 공포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돌연 그 검은 물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주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는 동안 이 친구는 이미 제당공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보일러실에 다 와 있었다. 그가 보일러실의 화부에게 다가가서는 "여보게! 나, 지금 정신이 없네!" 하자 화부는 "자네 무슨 일이야? 뻬뻬?"하며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한국 이름은 권창손(Kwong Chang Soon)이고 멕시코 이름으로는 호세 꾸앙(Jose Quang)인 이 친구는 호세라는 이름 대신 대칭으로 뻬뻬(Pepe)라고 불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자 화부는 그에게 이르길 "가서 잠이나 푹 자 두라고. 일은 내일 하도록 하고!" 그에게 일렀다. 이 화부의 충고에 따라 이 친구는 자리를 떴다. 화부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 드러누운 지 이틀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다고 뒷날 화부가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는 6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통칭 "무당(brujo)"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초자연적 치료를 받았고, 한편 의술사로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풀잎이나 식물을 이용한 치료도 병행해 받았다. 화부의 말에 의하면 이런 식의 괴질에는 뾰족한 치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 의사들도 나중에는 손을 들었다고 했다.

 

 

제당공장에 있던 한국인들 뿔뿔이 흩어짐 

 

불행은 제당 공장의 한국인들을 끝없이 덮쳤다. 그곳에 일했던 사람들 모두는 멕시코 내 여러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신광익 선생 한 분만이 오로지 그곳에 남았었다. 그러나 그분 역시 거기를 곧 떠났는데, 뒤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미국의 한인촌에 정착해 산다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소그룹을 지어 몇몇은 베라끄루스 주의 예전에는 산따 루끄레시아(Santa Lucrecia)라고 불린 헤수스 까란사(Jesus Carranza)시로 갔고, 다른 몇몇은 베라끄루스주의 베라끄루스시, 또는 베라끄루스주의 산 끄리스또발(San Cristobal), 산따 훼(Santa Fe), 산 후안 수가르(San Juan Zugar)시의 제당 공장으로 일거리를 찾아 떠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유까딴으로 되돌아 왔다. 

 

도시로 흘러 들어간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임시 정착을 하긴 했지만 더 이상 제당 공장에서는 일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에 제당공장에서 일할 때 '라 에스빠뇰라(La Espanola)'라 불리는 유행성 감기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슬픈 기억 때문에 그곳에서 또 다시 일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가족에 관계된 이야기 

 

어찌 됐건 우리 가족은 산 후안 수가르 제당 공장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셨다. 무슨 일을 하시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집 -꼭 옛날 오아하까(Oaxaca)에 살 때 살던 집과 다를바 없는- 계단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들것에 시체를 옮기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산에서 자라는 다듬지 않은 두 개의 통나무에 각 끝 네 면에 자루를 붙잡아 맨 이 들것에 그들은 시체를 실어 놓았고 그 위로 천을 뒤집어씌웠는데 시체의 반만 가리울 뿐이었다. 조금 뒤, 이 두 사람은 돌아와서는 들것과 자루에 다른 시체 하나를 재빨리 옮기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정오 전까지 세 명의 시체가 계속 옮겨지는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시체들은 사탕수수밭에 내버려 졌다고 한다. 사탕수수 밭이 언젠가 공동묘지가 될 날이 곧 올 것이다. 황당한 사실은 이들 두 사람은 시체를 내다 버리고는 곧바로 돌아왔는데 시체를 옮긴 사람 중의 하나가 돌연 죽었다는 것이다. 이 조그마한 제당 공장에서 이런 불상사가 연달아 일어나니 누군들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 부모님들 역시 제당 공장을 서둘러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아! 그러나 지금 회상해 보면 거기는 베라끄루스 주의 띠에라 블랑까(Tierra Blanca)! 커다란 식당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 우리들은 있었고...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엎드려!" 우리들은 얼른 몸을 수그렸다. 사지를 쭉 펴고 얼굴을 바닥에 묻고 드러누웠다는 표현이 차라리 더 어울릴 것 같다. 식당 유리창이 깨지면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 날라 들어왔고... 우리들은 한참이나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이 소란은 얼마 안 돼 멈췄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고, 단지 공포의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총격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기차가 하나 도착했고, 화물칸에 뛰어올라 짐보따리를 보니 우리 것이 분명하긴 한데 이 기차에 우리가 몸을 실었는지 아니면 다른 기차를 탔는지 지금 기억에 없다. 우리들이 열차에 오르자마자 또다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날아왔고 짐보따리에 여러 구멍이 났지만, 우리들은 무사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들은 베라끄루스 주 꼬사말로아빤(Cosamaloapan)에 도착, 거기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같은 주 산끄리스또발(San Cristobal)에 갔다. 그곳 제당 공장에는 벌써 한국인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거기에서도 우리 가족은 오래 있지를 못했다. 단지 한 사람만은 제외하고. 다시 말해 어머니만은 그곳에서 돌아가셔서 영원히 머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산 후안 수가르에서 병을 얻은 이래 많이 아프셨다. 아버지 혼자 힘으로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내가 어머니를 잃은 게 아마 7살이나 8살쯤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은 허전함에 제당 공장을 그만두셨다. 

 

아버지가 제당공장을 그만 둔 사실이 남아 있는 다른 한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산끄리스또발 뿐만 아니라 산따 훼(Santa Fe)에 있던 한인들 모두가 의견의 일치라도 본 양 제당공장을 떠났다. 다시 말해 제당 공장에 남은 한인들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들 유까딴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베라끄루스 지방에 좀 더 머물렀었다. 당시 아버지는 이곳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셨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우리들 역시 에네껜 잎을 자르는 일이 그래도 나을까 해서 다시 유까딴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하는 속담처럼.

 

 

초촐라(Chochola) 농장에서 

 

우리들은 결국 메리다시로 다시 돌아왔다. 농장에 가 보니 놀랍게도 한인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다. 그들은 전처럼 한인 계약알선업자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곧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어디서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일터로 한 번도 나를 데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 가고 싶은 생각에 한 청년에게 아버지가 일하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졸라댔다. 이 젊은이는 내가 여러 번 떼를 쓰자 소망을 들어주었다. 나는 여러 번 그곳에 갔었는데 아버지 일터에 가는 것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무개화차 위에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재미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놀이였다. 나는 매일같이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집하고 일터하고의 거리가 4km 정도로 멀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데만 해도 약 30분이 걸렸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나 역시 노새나 당나귀가 끄는 화차 위에 올라타고 노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일하는 농장에는 나이든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거의가 젊은이들이었다. 이 무개화차는 20명이 족히 탈 만한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탄 사람들 모두는 노끈, 물병, 자루나 방탱이, 점심 도시락, 그리고 칼 갈 때 쓰는 주울 이나 숫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노새가 끄는 화차가 갈 수 있는 거리는 30km 내지 35km정도로서 이 교통수단은 농장주하고 계약알선업자가 계약협정을 맺을 때 포함된 것이었다. 이전, 다시 말해 강제계약에 묶여 노동을 할 때는 이런 교통수단은 결코 제공되지 않았었다.

 

 

신들린 사람인가? 

 

나를 이쁘게 여긴 청년을 따라 농장에 갔었을 때, 사실 나는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기는커녕 언제나 귀찮게 굴고 놀리곤 했다. 화차 안에는 짓궂은 아이녀석들 뿐만 아니라 나이가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이상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화차에 타기만 하면 언제나 동쪽을 향해 앉고는 해뜨는 쪽을 향해 입을 벌리곤 했다, 그것은 태양 빛을 입에 집어넣고자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차에 탄 다른 짓궂은 젊은이들은 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 사람한테는 이것은 성스러운 행위였다. 아이들은 그가 입을 벌리기를 기다렸다가 오물을 입에 집어넣었는데 이 젊은이는 화도 내지 않고 단지 뱉어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좋아라고 화차에서 내려 오물들을 더 집어 와서는 계속 그의 입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꾹 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또 하나 이상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는 개미집을 찾아내서는 점심 식사용으로 가져간 도시락이나 음식을 개미집 앞에 놓고 개미집을 손으로 휘저어 부수었다. 그리고는 개미들이 음식물 주위로 몰려들면 그 개미들을 집어먹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들은 그가 믿는 신(神)이 태양신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이 같은 이상한 행동도 신앙심의 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화가 

 

지금 나이를 먹고 나서 그림이 무엇인지 요량은 하겠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나는 그림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를 못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당시 초촐라 농장에 계시던 김익주 선생의 그림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그분이 그린 그림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분이 초촐라 농장주의 커다란 저택 휴게실 복도의 벽 한 면에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분의 자제분 중의 하나로 후란시스꼬 김(Francisco Kim)씨가 있는데 그가 이야기하길, 얼마 전 아버지의 그림을 보러 거기에 갔었는데 아직도 벽화의 잔해가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김익주 선생의 자제분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농장주들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가진 농장주가 하나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와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정도가 됐다. 한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농장주는 한국인 공예 기술자들의 솜씨에 대해서 알게 됐고 특별히 이 김익주 화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를 고용한 이 농장주는 한인들에게 편견을 갖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는 농장에 있던 이 재주 있는 한인들과 여러 번에 걸쳐 계약을 맺어 고용을 했으니 말이다. 

 

한편 이 초촐라 농장은 상징적이지만 한국인들이 최초로 군사 훈련을 시행한 곳이다. 어려서 잘 모르기는 했지만 여기서 다양한 활동이 한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은 젊은이들로서 동포들에 대한 선행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마다치 않고 솔선수범했다.

 

 

떠돌이 농장 생활 

 

농장주들은 에네껜 자르는 작업에 원주민 노동력만으로 부족하면 한인들을 고용해 썼다. 몇몇 농장들은 몇 km나 되는 쭉 펼쳐진 광활한 밭에 사람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었다. 반면에 어떤 농장들은 밭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고용된 인원도 적었다. 이런 조그만 농장에서도 때때로 일손이 부족, 에네껜을 제때에 거두어들이질 못했고 에네껜 잎들이 썩어들어 가 농장주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런 이유로 대규모 농장들은 철 따라 한정 계약으로 한인들을 대량으로 고용했다. 다른 농장들은 밭의 수확 진전에 따라 5명에서 10명 정도를 계약해 썼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들은 외국인 신분으로 이 농장, 저 농장으로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우리들이 대 농장들에서 일하게 되면 덩달아 한인 가족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면 그곳에 역시 교회, 학교, 사무소 같은 것이 세워져 우리들은 오붓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런 큰 농장들에서는 대개 1년 또는 그 이상 한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농장들에서는 한인들의 숫자가 적어 한인들끼리 오순도순 지낼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들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천상 원주민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한인들은 그들의 초상집 밤샘에서, 첫 9일 상의식, 세례, 결혼 그리고 어떤 때는 성스러운 상(像)을 숭배하는 그들의 종교행사에도 참여하였다. 

 

원주민들의 집에는 대개 초콜릿이나 따말레스(Tamales)가 항상 준비돼 있었고, 웬만큼 사는 집에는 화덕에 구운 돼지고기 음식인 삐빌-께껜(Pibil-Quequen) 그리고 역시 유명한 삐빌-우아(Pibil-hua 화덕에 구운 빵)까지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 삐빌-우아라는 빵은 옥수수 가루에 돼지 버터를 섞어 반죽한 다음, 여기에 칠면조 고기나 돼지고기를 집어 놓고 양념을 치며, 색깔을 내기 위해 특별히 아치오떼(achiote)라는 일종의 향료를 친 다음, 마지막으로 두꺼운 바나나 잎 껍질로 그것들을 잘 덮어서 싼 다음 화덕에 넣어 만든다. 이 화덕은 정확히 말하면 땅바닥을 파 만든 구덩이인데 빵을 화덕에 집어넣기 전 우선 돌들을 빨갛게 달아오르게 한 다음 그 돌들을 구덩이 맨 밑바닥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다음 나머지 달군 돌들을 그 위에 층층이 쌓아 올려놓는다. 그리고 여러 겹의 바나나 잎으로 빵을 잘 싼 다음 그것들을 맨 위에 올려놓는다. 이제 화덕 속에 빵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제 같은 종류의 바나나 잎들을 빵 위에 펼쳐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뜨거운 돌들을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지면 높이까지 흙을 덮는다. 이렇게 열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한 다음 1시간쯤 지나면 빵이 익는 구수한 냄새가 퍼져 나온다. 손이 많고 힘은 들지만 아주 맛있는 빵이 되는 것이다. 

 

한편 종교축제가 있는 날에는 우리들 역시 어울려 춤을 추었다. 이미 언급했지만 농장주는 이 지방의 수호신인 신상을 숭배하는 축제날에는 농장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했다. 어떤 농장들에서는 농장주가 축제 비용의 일부를 부담했고, 어떤 농장들에서는 주인이 비용 일체를 부담했다. 이렇게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농장주는 남보다 친절하거나 인간적이고 마음 씀씀이에 있어 남보다 화통한 다시 말해 인간 됨됨이가 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도 레빤(Lepan)이라고 불리는 농장에서 이런 농장주를 만난 적이 있다. 

 

매년 농장에서는 농장의 수호신을 위한 축제가 벌어지곤 했는데 이런 축제는 보통 보름씩이나 계속되었다. 이런 흥겨운 축제일을 맞아 농장주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 그리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무도회에 초대했다. 그리고 사전에 계약을 맺은 밴드를 이 무도회를 위해 데리고 왔다. 이날에는 또 우리에 있는 송아지를 끄집어내 투우놀이를 했고 어린이를 위한 오락행사도 많이 벌어졌다. 한편 빨로 엔세바도(Palo encebado)라는 공차기 놀이도 이날 행해졌다. 그리고 축제 기간 중에는 사람들에게 쵸꼴로모(Chocholomo; 양념을 넣고 삶아서 만든 소고기 요리)라는 음식을 제공했다. 주인집 본가 앞마당(또는 농장주의 집 테라스)에는 갖가지 종류의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밤이 되어 축제가 파장되면 모두가 잘 곳을 찾아 자리를 떴는데 적당한 곳이 없을 때는 100㎡나 되는 넓은 정원의 테라스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악사들이나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들은 주인집 본가 방이나 복도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축제 기간 동안 경비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한시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담당 구역별로 두 세명으로 조를 짜 밤과 낮교대로 잠을 잤다. 

 

원주민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은 축제라고 해서 일상 일들을 팽개치면서까지 마냥 즐기고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하루하루 일을 해야 근근이 빵을 얻을 수 있는 우리들의 절박한 상황 때문이었다.

 

 

이찐깝(Itzinkap) 농장에 있던 가장 훌륭한 한국인 학교 

 

유까딴에 있던 한인들 대부분은 주로 농장이나 시골 마을, 또는 주의 수도에 거주했었다. 우리 가족의 경우 여러 다른 계약알선업자와 계약을 맺었고 여러 다른 집단들과 여기저기 여러 농장들을 전전했었다. 지금 기억나는 농장 이름들을 차례로 열거하면 이찐깝 농장 전에 초촐라(Chochola), 사낙따(Zanakta), 오슈꾸슈깝(Hoxkuxkap), 꼬옵츠까(Kohopchka), 오슈떼빠깝(hoxtepakap), 친낄라(Chinkila), 떼모손(Temozon), 꾸까(Kuka), 야슈꼬뽀일(Yaxkopohil), 산따 떼레사(Santa Teresa) 농장이 있었다. 지금 기억할 수 없는 여러 다른 농장들이 있었는데 이 농장들의 숫자는 위에 언급한 농장들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우리들은 한인을 상대로 농장에 취업시켜 주는 계약알선업자 이근하씨의 주선에 따라 이찐깝 농장에 도착했다. 많은 세대가 그 농장에 갔었는데 그들 중에는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어린이들도 많았고,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어른들도 서너 명이나 있었다. 한편 다른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러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 한국에서 카톨릭 신부를 지내셨다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의 성함은 변윤형이었다. 이 분은 에네껜 잎을 자르는 노동에 종사하셨는데, 일과를 마친 뒤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 학교에 자발적으로 나와서 그가 아는 지식을 모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또 다른 선생님으로 최종식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한국에 있을 때 학교 훈장이셨다고 한다. 이 분 역시 학교에 나오셔 저녁 7시에서 9시까지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농장에 있던 모든 한인 학교에서도 선생님 또는 교사 분들은 무보수로 어린이들을 가르치셨다. 어느 누구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찐깝 농장에 살았던 한인들의 집은 안에 칸막이 벽이 있고 함석으로 지붕을 올린 집이었다. 재료나 건축 양식으로 보아 초가집이라기 보다는 조그만 소도시 풍의 집들을 연상시켰다. 한국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은 끝에서 끝까지 사방 거리가 150m 정도 되는 한 구획의 주택단지였다. 이 단지 한가운데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로 단지에 거주했던 모든 한인들은 물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이 우물은 그들의 생명줄이나 다른 바 없었다. 집들은 1메까떼(Mecate), 다시 말해 20m씩 간격을 두고 쭉 늘어서 있었다. 단독주택은 없었고 마치 아파트처럼 모두가 한 블록을 이루고 있었다. 학교는 길모퉁이 반대편 전찻길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면 상태로 인해 학교는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 앞으로 전찻길이 지나갔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전차길만이 넓은 선로를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에네껜 운반용으로 만들어진 선로는 협궤였다. 이 길이 바로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을 농장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 나가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우리 가족은 특수한 경우에 속했다. 다시 말해 나는 배우는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두꺼운 나무 판자 둘을 이어 만든 큰 책상 하나와 긴 의자가 둘 있었다. 밤에 공부했던 우리들 역시 거기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학교는 유까딴에 있던 한인 학교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교였으리라 생각된다. '진성(進成)학교'(Chin(進); 앞으로, 또는 나아가다라는 뜻. Sung(成); 성취하다 또는 이루다라는 뜻)라고 자신만만하게 지은 듯한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8살 먹은 코흘리개 녀석들부터 어른들까지 총 25명 내지 30명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었다. 때때로 한인들의 결혼식도 이 학교에서 행해졌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할까 한다. 학교측에서는 결혼식을 기화로 학생들 전원에게 시험을 치렀다. 성적 결과에 따라 거기에 따른 상품들을 학생들에게 수여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서예 붓 

* 벼루 

* 먹(직경이 15mm에 길이가 15cm정도로 단단한 숯덩어리 모양의 둥그런 봉(棒)) 

* 먹물 통(직경이 약 6∼7cm 이고, 바닥이 2cm 정도인, 뚜껑이 있는 청동제 상자. 먹을 갈고 난 후 이 통에 먹물을 담는다.) 

* 공책과 수첩 

* 산수용 연필

 

시험은 결혼식 하루 전날 시행되었다. 그날 학교행사에 사람들이 초대되었고 거기서 화려하게 꾸민 학교를 보았다. 학교 안 곳곳에는 폭이 15cm, 길이가 150cm 정도인 종이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굵직한 붓으로 휘갈겨 쓴 한문(漢文) 싯귀들로 가득했다. 내가 대화내용을 들어서 안 이야기지만 실제로 글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글씨를 보러 학교에 왔다. 나는 여러 학부모들이 학생들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곧이어 우리들은 시험을 치렀는데 내 성적은 한마디로 형편없었다. 반면에 다른 녀석들은 많은 상을 탔다. 게다가 방문객들로부터 축하와 칭찬의 말을 들으니 그들이 받은 상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방문객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수고하신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미래의 희망인 어린 새싹들을 위해, 특히나 한인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무보수로 헌신하신 그분들이야말로 정말로 찬사의 말을 들어야 마땅했다.

 

 

한국식 결혼 

 

멕시코에서 산지 14∼15년이 됐어도 한인들은 그들 고유의 미풍 양식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한국 전통에 따라 유교식 도덕 윤리를 실천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또한 가문의 뿌리, 다시 말해 가계(家系)의 혈통을 잊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결혼할 한 쌍의 배우자들에 대해 혼담이 오고 갈 경우 양가의 사회적 신분이 대충 맞는지, 집안 관계가 서로 없더라도 혈연적으로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로의 가문을 캐 보았다. 이런 것들이 혼인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이런 전통이 결국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동성(同性)간의 결혼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공포하게끔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성씨(性氏)의 발음이 같다 하더라도 한자(漢字)가 틀리면 결혼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부연하면 한국인들의 성이나 이름은 한자의 배열로 식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본(本)이나 돌림자로 일가 친척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이런 '위험'한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결혼 당사자들의 부모들은 본인들의 의향과는 관계없이 마치 물건처럼 일방적으로 혼사를 처리하고 혼례식 날짜를 정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신랑 신부들은 결혼식 날이 되서야 비로소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옛 제도와 관습을 여전히 고수하는 부모들 앞에 많은 젊은이들이 순순히 따랐고 이런 행동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만의 애정으로 뭉쳐져 부부로 맺어지는 경우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의 강요로 맺어진 부부들 사이에 자살 사건이 일어나고는 했다. 당시의 한국 전통을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가정불화가 생겨도 별거나 이혼이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참석했던 어떤 결혼식, 즉 이미 양가 부모들 사이에 서로 이야기가 되어 한국식 관습에 따라 결혼식을 올린 한 쌍의 경우이다. 이들 젊은이들은 이미 연애로 만난 사이였으며,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이 무르익었고 잘 화합했기 때문에 이런 진실한 젊은이들의 모습은 양가 부모들을 기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덩달아 흐뭇해진 부모들은 결혼식 피로연을 1주일 이상 열었고 무려 300여 명이 넘는 농장 사람들을 초청할 수 있었다.

 

 

결혼식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있던 신랑집 마당에는 하객들이 와 앉을 수 있도록 널빤지로 임시로 만든 계단식 의자들이 준비돼 있었다. 중앙에는 자그마한 주례용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장소가 꽉 차 사람들이 움직이기에 조금 불편했다. 나는 결혼할 신부의 남동생이긴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도 나를 결혼식에 데려다주지 않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결혼식은 한국식답게 고풍스럽게 행해졌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나중에 신부의 의상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나에게는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고 희한하기조차 했다. 그런 모습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옷을 갈아입은 신부가 신랑과 함께 사진을 찍으러 농장주(본가)가 사는 저택 쪽으로 향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홀로 지켜보면서 나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생각하니 내 자신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튼 나무 계단석은 하객들로 꽉 차 있었고 그 밑으로 신랑 신부가 사람들(나를 제외한)에 둘러싸여 서 있었다. 그 당시에는 사진사들이 흔치 않아 사진을 찍기 위해선 농장에서 메리다까지 나가 사진사를 데리고 와야만 했다.

 

 

피로연 음식 

 

유 선생 일가는 4∼6일 동안 거의 400명 가까운 결혼식 하객들을 접대하면서 많은 비용을 썼다.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중국복권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도박장에서 복권을 팔았다.- 에 당첨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겠냐고 쑤군덕댔다. 

 

아무튼 나는 유 선생 집에서 막 도살한 암소 반 마리와 통돼지 반 마리, 그리고 술 동아리들(여기에 담겨 있는 술은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로서, 이곳에서 다른 종류의 술은 구할 수 없었다), 쌀 포대, 채소들이 무진장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칠면조나 닭고기 및 계란이 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보질 못했다. 반면에 접시에는 뭔지 모르지만 날 짐승 다리와 틀림없이 메리다의 중국인 상회에서 사 온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음식물이 놓여 있었다. 

 

이것 말고도 집 안팎으로 창호지로 만든 초롱불(안에 초가 들어 있는), '띠끼-뜨라께스(Tiqui-traques)라고 불리는 한 줄에 20개 내지 50개 정도 달려 있는 불꽃놀이용 폭죽이 있었다. 이 놀이는 어린이라면 누구나 좋아했던 놀이였다. 나도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어울려 놀았는데 정말로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놀지는 못하고 주로 낮에만 폭죽을 터뜨렸다. 밤이 되면 졸려서 잠을 자러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어른들은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밤을 새며 놀았는데 몇몇 사람은 깡통과 막대기를 준비해다가는 마치 악기 인양 한국 노래 가락에 맞춰 두드려 댔고 다른 사람들은 이 장단에 맞춰 합창하고 춤을 덩실덩실 추어 댔다. 어찌됐든 사람들 모두가 흥겹게 놀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취해 더욱 즐거운 기분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노름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국 화투라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꽤나 신기했다. 아마도 이민 올 때 한국에서 가지고 온 모양으로 낡고 닳은 모습이 내 눈에 역력했다. 마당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노끈에 매달린 초롱불들이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은 이 초롱불이 꺼지지 않고 주위를 환히 비출 수 있도록 밤새 지키고 있었다.

 

 

손님들하고의 작별 

 

며칠 동안의 향연 끝에 마침내 헤어질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부터 화차가 사람을 실어 나르기 위해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차는 사람들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처럼 두 레구아(leguas)정도 거리의 기차역과 농장 사이를 6번 내지 7번 왕복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슬펐고 마을엔 마치 사람이 하나도 안 사는 것처럼 또다시 적막이 찾아 왔다. 더군다나 그 동안 농장일은 잊어버리고 일주일 동안 놀기는 잘 놀았는데 또 다시 그 지긋지긋한 일을 매일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 축제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떼로손 농장으로 옮겨갔다. 거기서도 우리들은 얼마 머물지 못하고 다시 쇼약크체(Xohyaxcheh) 농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계약알선업자인 유필준 씨가 있었다. 한편 이 농장에는 학생들을 가르칠 만한 선생님이 한 분도 없었고 사람들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농장은 조그마했고 다른 곳과 비교해 한인회 조직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대한공립협회 회장의 멕시코 여행 및 유까딴 방문 통보

 

 

안창호 선생님의 도착 소식 

 

1919년 대한 독립 만세 소식이 여기 멕시코에도 들려 왔다. 한국인들 모두는 이 소식에 다시 고무되어 한인회 조직을 새롭게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번 경우를 계기로 정착을 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 즉 여러 지역에서 뜨내기 생활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시 유까딴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장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다시 에네껜 절단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다시 만나니 새롭게 뭉쳐진 모습이었다. 이제 어린아이들(2세대) 역시 미약하나마 제 몫을 다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스페인어를 어른들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했고 여기 풍습을 더 잘 알았기 때문에 일거리를 찾는데 어떤 때는 어른들보다 더 신통한 생각을 해냈다. 

 

주의 수도 메리다 시뿐만 아니라 농장에도 새롭게 학교가 세워졌고 개신교회의 역할이 보다 강화되었다. 한편 한인회 집행위원회는 농장에 있던 위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능동적으로 일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우선 한인회는 한인회관을 엘 빠보(El Pavo) 거리 모퉁이에 있던 넓은 집으로 옮겼다. 더불어 하숙집을 겸한 한국 식당들이 곳곳에 늘어났다. 농장에서 주 수도인 메리다를 방문하는 사람도 많이 늘어갔다.

 

 

안창호 선생님이 메리다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알려짐 

 

한인들 모두는 독립운동 지도자의 방문 소식에 도착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메리다 한인회는 돌연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언제 도착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한인회 간부들은 자발적으로 따라 나온 사람들과 함께 안 선생을 영접하러 쁘로그레소(Progreso) 항구로 나갔다. 수십 명의 한인이 항구에 도착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배는 도착했으나 메리다행 기차 시간이 이미 지났으므로 천상 선생께선 배 안에서 하룻밤 주무셔야 했다. 영접 나간 사람들은 노천에서 밤을 새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당시 쁘로그레소 항구에는 숙박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람들은 다시 부두에 나가 안 선생을 맞았다. 그런 다음 모두들 곧바로 메리다행 기차에 올라탔다. 이미 한인회에서는 안 선생이 머무를 방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이제 모든 동포들을 만날 일요일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내 고대하던 일요일이 왔다. 그날 500명이 넘는 동포들이 안 선생님을 보러 우르르 몰려 왔다. 한인회 집행부 간부들로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럴 것이 각 농장에서 메리다까지 오는 기차 시각을 고려해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집행부는 오후 두 시 이후에나 행사를 시작할까 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모인 것으로 생각하고 결국 집회를 오후 2시로 결정했다. 모두들 모여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기념식 

 

한인회 회장은 인사말과 함께 개회식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안창호 선생을 밀집한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한인회 총무는 한국과 멕시코를 위해서 인사말을 했고 마지막으로 한인회 회장은 전체 한국인을 대표하는 회장 자격으로 선생님께 공식 환영 인사를 드렸다. 마지막으로 이 행사의 유일한 연사이신 안창호 선생의 연설이 시작됐다.

 

 

연설

 

선생께서는 우선 전체 한인회 사람들의 환대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명하시고 나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불행한 사건부터 언급하기 시작하셔서 애국지사들의 자결, 동포들의 굴욕, 재산 박탈, 가정집 약탈, 무자비한 만행, 무고한 양민들에 대한 총검살해, 식량 배급,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와 순교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는데 참으로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들이었다. 

 

가끔 끊어지긴 했지만 힘차고 열변인 목소리로 1919년 3월 1일 33인 대표가 공포한 대한 독립선언 소식과 만세운동을 언급하시면서 다시 연설을 계속해 나가셨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자식들 입에 물린 재갈을 떨쳐 내고 압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궐기해 나섰다가 적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탄압 앞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봉기 기간에 적들은 무기도 가지지 않은 무방비한 동포들을 거리에서, 심지어는 집안까지 쳐들어가 살해했습니다. 이때 사춘기를 갓 넘어선 한 소녀가 부엌에 있다가 대량학살 장면을 목격하고는 순간적으로 방으로 뛰어들어가 궤짝을 열고 태극기를 꺼내서는 거리를 뛰쳐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일본 병정들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은 다음 즉석에서 양팔을 베어 버렸습니다. 증오심에 불타올라 고통도 잊어버린 이 소녀는 다시 만세를 부르기 위해, 몸을 쭈그려 땅에 떨어진 태극기 하나를 입으로 물어 올리려고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단지 그녀의 꺼져가는 목소리 '마안-세... 마안...'하는 소리만이 사람들 귀에 울렸습니다. 그러자 이 잔인 무도한 한 군인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을 쳤습니다. 

 

이 운동 기간 이 피에 굶주린 적들은 아무 죄 없는 갓난애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였느냐 하면 집안까지 쳐들어가 갓난아이들을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 가지고는 공중으로 집어 던진 다음 떨어지는 것들을 총검으로 배를 쑤셔 죽였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인 성인 남자들한테는 십자가를 만들게 해 그것을 짊어지게 하고는 벽 쪽으로 데리고 가서는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총검으로 배를 가르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하나님도 이렇게 죽었으니, 너도 이렇게 죽어라.' 이런 짓 말고도 흉악무도한 경우를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자면 한이 없겠지만 여러분들의 시간을 더 뺏지 않기 위해서 이 정도로 해 둘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더 하고자 하는데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들은 대외정책을 교묘하게 잘 구사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보면 이제 우리의 조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산 많은 일본의 현 정도나 될까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예견했던 바지만 이 10년 기간 동안 우리의 적은 다른 나라들하고 정치외교를 너무나도 비상하게 잘 하고 있어 우리에게 조금도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물리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 조국의 불행은 심각한 지경에 까지 와 있습니다. 지금 고국의 동포들은 적들에 대항해서 싸우지 못하고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조국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태평양을 횡단해 여기 올 때 저마다 단장의 쓰라린 기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들은 밖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선의의 결정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여러분들이 조국의 품으로부터 떨어져 이렇게 살고 있더라도 여러분들에게 언명하노니 우리들은 생명엔 아무 지장 없이 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겠지만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어려운 사태 앞에서 우리들은 4000년 유구한 역사이래 우리 혈관에 용솟음치는 피를 외면할 수 없고 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변명할 조금의 여지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 우리의 힘이 다할 때까지 서로 협심하여 단결합시다. 조국의 독립이 달성될 그 날까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한 어떤 희생이 닥쳐와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강연장의 분위기

 

안창호 선생님께서 연설하시는 동안 실내에는 파리의 윙윙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청중들은 머리를 떨구고 있었고 충혈되어 붉어진 눈자위로 연신 손수건이 올라갔다. 어느 누구 하나 말 한 마디 하는 사람 없이 숙연해 있었던 것이다. 

 

한인회장이 일어나서 몇 분의 복음 전도사들께 기도를 청했고, 기도가 끝나자 회장은 모임의 종료를 선언했다. 집회가 끝나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안창호 선생께 인사하기 위해 일렬로 줄을 섰다. 이 인사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시간이 벌써 꽤 되었으므로 모두들 식사를 하러 식당들을 찾아 나섰다. 마지막으로 그 뒤를 이어 안창호 선생, 한인회 회장, 총무, 재무 담당 등 한인회 집행 간부들 모두가 지정된 식당으로 갔다. 얼떨떨한 나도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는 한인회 총무일을 맡고 계셨다. 식당 주인은 일행이 도착하자 빠른 걸음으로 뛰쳐나가 안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그분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이미 식당에는 손님들을 위해 젓가락, 식기류, 접시 등이 마련돼 놓여 있었다. 나는 어른들 자리에는 끼질 못하고 주방에 있게 되었다. 

 

식사 후에 우리들은 다시 한인회관으로 돌아왔다. 나는 거기서 방 하나에 안창호 선생님을 위해 침상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고 또 아버지용으로 하나가 더 준비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안 선생님이 유까딴에 체류하시는 동안 그분을 줄곧 수행하셨는데 이 일은 한인회 총무가 마땅히 해야 할 임무로서 한인회가 아버지께 정식으로 부여한 것이었다.

 

 

농장 방문

 

그 당시 내가 메리다에 왜 있었는지 왜 다시 농장으로 돌아갔는지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쇼야께(Xo-yax-heh) 농장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농장에 있었을 때 나는 안창호 선생님께서 그리로 오실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때 계약알선업자 하나가 이 귀한 손님을 맞이해 머리를 조아리면서 갖은 공손을 다 떠는 모습을 보았다. 심지어 그는 안 선생님께 운전사가 딸린 자동차 한 대를 구해 와서는 쓰시도록 했다. 이 자동차는 농장주의 전용차로 농장주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 기차역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농장으로 데려오기 위해 사용된 차였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터로 나갔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어디에서 오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나는 내 친구들과 함께 그분을 시중들도록 되어 있었다. 밤이 되자 선생님께선 주전자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문밖에 놓으라고 우리들에게 일렀다. 그날 밤은 날씨가 무척 추웠다. 다음날 새벽 3~4시경인가 그분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기척이 들리기에 우리들은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특별히 선생님을 쭉 가까이 모시고 있던 친구 녀석도 문을 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선생님이 주무실 잠자리를 이미 마련해 드렸고 물 주전자를 갖다 놓아 드렸고, 컵, 수건, 세숫대야, 요강, 비누를 방에 넣어 드린 다음 물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저 선생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실 순간만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하도 이상해서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는데 놀랍게도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서로 맞대고 두 발을 뒤로한 채 숙소 안에 앉아 계셨다. 이 무릎 꿇은 자세는 어른들이나 존경하는 분들 앞에 앉는 자세로서 전통적인 한국인들의 앉는 방식이었다. 선생께서는 마치 누구에겐가 구원을 구하는 것처럼 두 손을 깍지 끼워 잡은 채 입술을 연방 움직이면서 몸을 떨고 계셨다. 침대도 덩달아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기도를 드리고 계셨던 것이다. 나와 내 친구는 뒤에 다시 선생님 숙소에 가 보았는데 이제는 그분이 옷을 입고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계약알선업자인 친구 아버지가 이른 데로 선생님께 조반 드시라고 전갈했다. 그 분이 식사를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선생님을 밭까지 안내해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장갑과 칼을 달라고 하셨다. 그런 다음 장갑을 끼시고는 에네껜 잎들을 손수 자르기 시작해 여러 잎들을 자르셨다. 여러 사람들이 "이제 그만하십시오" 하고 말렸다. 같은 날 오후 그분은 곧장 다른 곳으로 떠나셨는데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인들이 사는 또 다른 농장 마을로 가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농장에서 안창호 선생님을 환영했고 융숭하게 맞아들였다는 소식이 곧바로 들려 왔다.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예배를 함께 드렸고, 학교가 있는 농장에서는 선생님 참가 하에 상징적으로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안 선생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농장노동자와 똑같이 준비하시고는 그들과 함께 밭으로 나가셔 똑같이 일하시고, 또 함께 돌아오시곤 했다.

 

 

실업자 구제조합

 

안창호 선생님은 여러 농장을 방문하면서 에네껜 밭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포들의 참상을 보시고는 이를 딱하게 여기시고는 한 모임에서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대책으로 회사를 하나 설립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주식을 통해 돈을 모금하고 일단 돈이 모이게 되면 그 돈을 가지고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지역에다 땅을 사서 여기 멕시코에 있는 한인들을 농장 노동자 자격으로 이주시켜 땅을 자유롭게 경작하게끔 하는 방안이었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 지방, 또는 미국 도처에는 싼 시세로 팔려고 내 놓은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무궁무진 있었는데, 그 기회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유까딴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안 선생님의 말씀은 의견 개진이 아니라 하나의 지상명령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 다음 곧 분할 납입금의 액수와 주식 배정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 검토하기 시작했다. 여러 의견들이 속출했는데 결국 2년 연불로 총 불입금을 250뻬소로 하고 월 분할 납입금을 10뻬소로 정했다. 단 원하는 주식의 양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현금을 주고 사든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주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불입금을 매월 납부하기만 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주 이상씩을 신청했다. 거래 단위로 쓰일 쿠폰(Tacos)을 만들어 주는데 한달 이상이나 걸렸다. 왜냐하면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에 전표 제조를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두 종류의 아연판(하나는 채권 구입 시 필요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신청 예약시나 또는 분할 납입 때 영수용으로 사용될)을 따로 만들어야만 했는데 이것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쿠폰이 일단 도착하자 사람들은 신청 예약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한인회 재무담당에게 돈을 직접 지불하고 공채를 가져갔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부 재무담당은 이렇게 수금한 돈을 미국에 있는 국민회 본부 재무담당에게 다시 송금했다.

 

나 역시 공채를 사려고 돈을 모았고 그 모은 돈을 그때까지 한인회 총무 일과 메리다에 있는 학교 선생님을 하신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께서 내 몫으로 공채를 사셨는지 안 사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돼 위탁금 횡령 소식이 떠돌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기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매달 내는 납부금도 내지 않았다. 이 횡령 사건이 국민회 메리다 지부 재정담당 짓인지 아니면 로스엔젤레스 국민회 중앙본부 재무담당의 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안창호 선생은 한국에서 감옥살이하실 때였다. 만약 안 선생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런 지저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사람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지도자 선생님께서 여기 오시고 유까딴에 머무시는 동안은 한인회 집행부 사람들은 사기가 충천했고 한인회 일도 활발히 돌아갔다. 그래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집회 장소는 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꽉 채워져 있었다. 어느 누구도 월 회비를 늦게 내는 법이 없어 재무담당은 한인회 경비 마련에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시기, 다시 말해서 안 선생님이 여기에 머무셨던 해에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임시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이 임정은 중국정부의 일부 재정적 원조와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중앙본부가 보낸 헌금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 헌금들은 미주에 거주하는, 아니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 동포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유까딴에서도 이미 책정된 특별비용 명목하고는 별도로 연(年) 1뻬소라는 새로운 분담액을 정했다. 그러나 돈을 내는 사람 중의 누구도 이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즉 한인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면 어떤 부담금이 됐던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비록 여기 있는 한인들 모두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남루한 옷을 입었을 망정 질식해 죽어 가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음

 

나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나눈 대화 내용들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여기 한인들은 매주 토요일 동포 중의 한 집, 또는 집 마당에 그룹별로 모여 회합을 갖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인 일본에 반대해서 궐기했던 그 날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고, 몇몇 다른 사람들은 강제노동 계약으로 농장에서 겪었던 고생스런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은 그 시절과는 비할 바가 아닌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우리가 발을 디딜 고향조차 뺏기고 더군다나 우리의 사랑스런 동포들은 학살당했고 우리 동포들의 재산은 약탈당해 모든 사람들이 길로, 거리로 쫓겨나가야만 하는 슬픈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들은 여기 멕시코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섬기거나 또는 복종할 대상이 없긴 하지만 우리에게 바뀌어진 게 무엇이 있는가. 반대로 만약 우리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적들의 손에 생명조차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동안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담배, 술(럼주) 심부름을 시켰고, 군것질할 돈을 우리들에게 주었다. 몇 잔술에 흥이 난 어른들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그 효과가 금방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술기운이 오른 어른들은 그들의 과거를 있는 대로 다 털어놓고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고, 모두들 소용없는 비통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는 억제할 수 없는 심정으로 우리들 어린아이들을 부둥켜안고는 눈물을 흘리시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은 우리들이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모였던 여러 자리에서 여러 어른들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4년간의 강제 계약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처참한 생활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3.1節 기념식

 

3.1운동 1주년 기념식이 다가왔다(1920년) 수많은 한인들이 그들의 일터를 떠나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메리다에 본부가 있는 한인회관(그때까지도 이 건물은 빠보(Pavo)가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다)으로 몰려들었다.

 

메리다의 한인사회가 이런 성격을 띤 회합을 갖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이유로 농장에 거주하고 있던 전체 한국인들 중 반수 이상이 이곳에 모였다. 그러는 동안 농장은 말 그대로 텅텅 비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많은 농장들에서 일하고 있었던 한인들은 농장주들의 뜻에 반해서(왜냐하면 이런 식의 결근은 계약위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손을 잠시 멈췄다. 그러나 어떤 농장에서는 한인들의 이런 모임을 좋은 의미로 기꺼이 받아들였고, 게다가 교통수단(말이 끄는 무개화차 같은)까지 제공해 주었다.

 

한편 메리 다에는 지도자 선생과 한인회 집행위원회 전체 간부들 그리고 수백 명의 참석자들이 식당이나 여관들에 몰려 있었다. 나도 그때 아버지를 따라 메리다에 갔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른들 틈에 낄 수는 없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한인회관을 향해 가시던 안창호 선생님께선 옥상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시고는 고개를 숙이신 채 "우리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우리들은 우리의 국기를 게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안 선생께서 국기를 거두라고 했을 때 우리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그런 지시를 내리셨는지 알지도 못한 채 우리들 모두는 침묵 속에 말없이 있었다.

 

기념식 시작 

· 한인회 회장의 개회 선언 

· 한인회 총무 지난 번 총회의 의사록 낭독 

· 재무담당의 회계보고 

· 회장 이의유무(異議有無)요청 

· 총회의 결정사항 승인여부 표결에 부침 

· 회장, 안창호 선생에 연설을 요청 

· 회장, 애국가 제창을 제의. 전원기립. 큰소리 합창 

· 회장, 명예직 인사들 소개. 모두들 박수갈채로 환영 

· 회장, 안창호 선생님께 폐회 말씀 요청

 

안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우선 인사를 했다. 한국 건국에 관한 설명과 함께 강연을 시작하시고는 중국의 한국지배, 조선독립, 러일전쟁, 일본의 조선병합을 위한 7개 조약과 뒤의 또 다른 8개항 조약, 33인 대표의 독립선언, 3.1운동의 실패에 따른 수천 명 동포의 죽음, 해외 각지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리고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여기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유까딴에 거주하는 모든 동포들을 포함해- 지금 적들의 탄압 앞에서 너무도 절망적이므로 해외에서 살고있는 우리들 각자가 힘을 합쳐 모든 힘이 다할 때까지 적과 계속 싸워 나가자고 말씀하셨다. 

 

연설을 마친 선생님께서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이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지난번 집회에서처럼 고개를 폭 떨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서야 기념식은 끝났다. 

식이 끝나자 청중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안 선생께 예기치 못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선생님! 저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에 어떤 뜻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일어나시더니 마치 학생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셨다. 

 

"지금 저에게 이 질문하신 분은 알려고 하는 욕구가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이런 의욕을 가지신 분이야말로 조선의 정신을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내일 아침 일찍 오십시오,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분명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기차가 오후에 출발하므로 다른 분들은 늦지 않게 일터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날 선생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선생님께서 식사를 드시고 난 뒤 오전 9시,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아무도 떠남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벌써 자리에 다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국기는 한인회 사무실 후미 벽에 여전히 걸려 있었다. 회의용 탁자 주위로 한인회 간부 전원이 빙 둘러앉았다. 안 선생님이 회장과 함께 도착하자 모두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존경을 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순전히 배움의 목적에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안 선생님께서는 오늘 우리들 대부분이 사실 그 동안 모르고 지나쳐왔던 우리나라 국기에 대해 그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난 뒤 안 선생님이 일어나시더니 말씀을 이었다. 

 

"어제는 시간이 많이 되어서 여러분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오늘도 여러분들의 바쁜 시간을 쪼개 이렇게 또 이야기하게 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지금 제가 가진 짧은 지식이나마 아는 데까지 여러분들께 설명할까 합니다. 

 

국기라는 것은 저마다 각각의 나라들을 상징하는 기장으로서, 모든 나라들의 국기는 외견상 그림 무늬와 색깔이 있는 천 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단순하지만 또 어떤 것들은 그 담겨져 있는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 형태를 조사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국기란 모름지기 건국 이전에 몇몇 특출난 사람들에 의해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일단 한 국가가 수립되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깃발로서 근거가 있고 적합한지를 검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기

 

"우리들 국기의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 보듯 그런 변천이나 부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고대 철학을 이웃나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어찌됐건, 이 철학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도 더 전에, 즉 한국(역주: 여기서 저자는 고려(KooRyoo)라는 말을 쓰고 있다. 여기서 고려는 AD 10세기에 태어난 고려 왕조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략 유교가 탄생하기 5세기 전에 중국의 복희씨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안 선생님은 오른손에 든 가느다란 작대기로 태극기에 나타나 있는 도형들을 가리키며 설명하시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형성된 동그란 원은 무한을 의미합니다. 중앙의 원안에 두 개의 무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주의 두 개의 근본원리(역자주: 음양원리)가 생성되는 것을 나타내주고 또 원초의 통합성을 구성하는 무한부터 모든 것이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청색부분으로 나타나는 원소는 하늘과 함께 무한한 공간을 상징하며, 대기는 전 우주세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우주나 지구를 나타내주고 있으며, 한편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및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작용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도형은 창조의 이원성, 즉 남녀, 밤과 낮,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좌우와 같은 두 대극적 요소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같은 원리로서 자연의 창조적 그리고 생명력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