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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

망국의 한 딛고 이룬 '멕시코 드림' … 고흥렬 할머니

by 최재민 선교사 2021. 1. 24.

 

 

[어머니] ⑨ 망국의 한 딛고 이룬 '멕시코 드림' … 고흥렬 할머니

[조선일보 2005.05.13 18:46:52]

 

 

 

1905년 5월 15일. 1,033명의 조선인들이 인천항을 출발해 멀리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향해 떠났다. 그들 중에 고희민·김순이 씨 부부가 있었다. 에네껜(Henequen) 농장 주인과 맺은 계약 기간이 4년.


메리다시에 도착했을 땐 숨을 쉴 수조차 없는 무더위에 하늘이 노랬다. 집은 지붕을 갈댓잎으로 덮어놓아서 꼭 외양간 같았다. 그러나 이를 앙다물었다. 가시 돋친 선인장 잎을 하루 2,500개씩 잘라야 하루 일이 끝나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지만, 그 사이 태어난 맏아들 안고 고향 땅으로 떵떵거리며 돌아갈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그때 엄청난 소식이 날아들었다. 1910년 한·일 합방. 돌아갈 조국이 사라진 것이다.

 

고흥렬(79)씨를 만난 곳은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행사가 열리던 멕시코시티. 멕시코 북동쪽 누에보 라레도라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축제를 보기 위해 3,000㎞를 달려왔노라며 노인은 활짝 웃었다. 그의 어머니가 김순이씨였다.


“제가 7남매 중 막내딸이에요. 지금도 간장만 보면 어머니가 떠올라요. 간장이 먹고 싶어 까맣게 태운 설탕에 물을 부어서 드시곤 하셨지요.(웃음) 한 날은 선인장 껍질과 수박 껍질로 김치를 만드시고는 우리를 큰소리로 불러 모으세요. 쌀밥에 배추김치 한 번 먹어보는 게 어머니 평생 소원이셨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고씨는 고생하는 어머니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새벽 서너 시만 되면 선인장 농장으로 떠나 12시간을 뙤약볕에서 일하셨지요. 의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날엔 매를 맞고 오셨는데, 선인장 가시에 찔린 팔과 다리에 늘 핏물이 잡혀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7남매 먹을 음식 장만하랴, 옷 지으랴 허리 펼 새 없었던 어머니였습니다.”


가난 탓에 고씨는 초등학교까지밖에 다니질 못했다. 대신 부모님을 도왔다. 농장 인부들의 빨래와 음식거리를 만드는 일로 돈을 벌었다. 스물세 살 때인 1949년엔 ‘고난의 땅’ 유카탄 지방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왔다. 거기서 같은 이민 1세대인 알프레도 김 씨를 만나 결혼했다.

 

자신이 낳은 4남매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르치고 싶었다. 대물림된 가난이었지만 땜쟁이, 공사판 막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아이들 학비를 모았다. 덕분에 대학을 모두 졸업한 4남매는 공인회계사로, 대기업 직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막내딸인 자네트(52)씨는 어머니를 따라 한국대사관에 다니던 추억을 들려줬다. “날이면 날마다 제 손을 꼭 잡으시고는 대사관 담 밑을 서성이셨어요. 시집은 반드시 한국사람에게 가야 한다며 신랑감을 찾으신 거죠.(웃음)”

 

고씨와 함께 축제를 보러 온 대학생 손녀딸 바네사(25)씨는 “할머니가 틈나면 들려주시던 색동옷, 청사초롱 등불이 내가 상상했던 것들보다 훨씬 아름답다”며 신기해했다. 물론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아본 적 없는 고씨가 어릴 적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드실 때면 나란히 누운 자식들을 바라보며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색동저고리가 얼마나 예쁜 옷인지, 한겨울 먹는 배추김치 맛이 얼마나 깊고 아삭한 지…. 너희들이라도 꼭 조선 땅에 가보라고 하셨는데, 그 소망을 여태 못 이뤘습니다.” 

 

[조선일보 멕시코시티=이기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