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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쿠바 한인 이민사

by 최재민 선교사 2021. 1. 23.

 

 

쿠바 한인 이민사

                                                                       

서  성  철 (재외동포재단)

 

 

 

I. 들어가는 말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재외 한인들은 얼추 57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민과 관련해서는 많은 관심 및 학술적 연구활동이 있어왔고 지금도 그런 현상은 여전하다. 그러나 한인동포들이 사는 또 다른 거대한 지역인 중남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미했고 또 어떤 때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소외되어왔다. 그러나 노동력의 세계적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은 하와이 이민과 멕시코 이민만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중남미 이민 최초의 나라인 멕시코 이민에 관한 연구는 일천함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멕시코 이민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하는 또 다른 지역, 다시 말해 쿠바로 간 한인들의 역사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 연구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한국과 쿠바 사이에 외교관계가 없는 것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없는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쿠바에 홀로 떨어진 한인들의 삶과 역사는 무관심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우리들은 민족사의 서글픈 한 장(章)을 잃게 되었다. 사실 멕시코와 쿠바의 이민은 한국과 중남미라는 거대한 대륙과의 최초의 만남이라는, 어찌 보면 대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최초의 만남은 불행하고도 슬픈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쿠바 이민에 관해서 우리들이 아는 정보는 지극히 적다. 1921년 쿠바로 간 한인들은 1905년의 초기 멕시코 한인 이민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먼저 멕시코 이민에 관해서 먼저 알아보고 한정된 자료를 통해 쿠바 이민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II. 에네껜의 나라-멕시코 이민

 

우선 우리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어떻게 해서 한국인들이 생전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 미지의 멕시코 땅에 올 생각을 했을까? 1905년, 한국인들의 멕시코 이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우리들은 영국 국적을 가진 마이어스(John G. Mayers)라는 상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에네껜(henequén)1)을 재배하는 멕시코 대농장주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자로서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 사이, 유카탄 대농장들이 겪었던 극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1904년 아시아에 간다. 

 

에네껜 식물은 여기 인디오 원주민들이 처음으로 이용, 노끈이나 밧줄, 또는 마포(麻布)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는데, 나중에 유럽인들이 선박용 로프로서 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농장주들은 유카탄 반도 전역에 걸쳐 에네껜을 대규모 재배하기 시작했다. 한편 19세기 중반 미국은 소맥 산업이 번창, 밀가루 포대를 묶는 끈으로서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으로 환영받아 에네껜 수요는 날로 증가 일로에 있었다. 문제는 노동력이 언제나 부족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에네껜 플랜테이션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이 유카탄 반도의 원주민이었던 마야족(Maya), 그리고 멕시코 북부 소노라(Sonora) 주에서 강제로 끌고 온 야키족(Yaqui)이었다. 그러나 마야인이나 야키족은 체격이 작고, 체질적으로도 강하지 못해 무서운 더위의 중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당시 중국인, 일본인들의 미 본토 및 하와이 이민 사실을 알고 있었던 멕시코 농장주들은 이 부족한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아시아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해서 1800년대 말쯤에는 중국인들이 유카탄 반도에 대거 들어와 있었다. 

 

마이어스는 중국(당시의 청나라)에 가, 중국인들을 더 데려오려고 했으나 이미 와있던 중국인들이 농장에서 혹사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이 본국 중국 정부에까지 알려지자 중국 정부는 자국민들의 대 멕시코 이민 송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게 된다. 이에 실망한 마이어스는 일본에 가 일본의 한 이민 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와 접촉, 일본인 노동력을 알아보나 당시 이민 보호법이 발효된 일본에서 일본인들을 멕시코로 데려가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다. 이 일본 이민 회사의 부사장이었던 히나타 테루마케(白向輝武)와 교섭을 하는 사이, 마이어스는 이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고 멕시코와 국교가 없는 조선에 가면 필요한 노동력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이어스는 히나타에게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 노동자들을 데려가려 하는데 이 이민 회사가 직접 나서 이민 모집을 해주면 좋겠다고 의뢰를 한다. 이 요구에 응해 히나타는 서울에 ‘대륙식민합자회사’ 출장소를 설립, 이민 모집을 개시한다.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진 가운데 마이어스와 히나타 사이에 계약서가 조인되는데, 이 계약서에 따르면 모집, 소송 등 모든 제반 사항은 ‘대륙식민합자회사’가 책임지고 여기에 따르는 모든 비용은 멕시코 고용주(농장주)측에서 부담하기로 돼 있었다. 그리고 이민대행 수수료 역시 고용주 측에서 한 가족 당 파운드화로 4파운드, 독신자인 경우에는 1파운드씩을 ‘대륙식민합자회사’에 지불하도록 돼 있었다.2)

 

실제로 계약 이민 모집은 각 지점에 한국인 알선인을 두고, 그들에게 ‘식민회사’가 수수료를 지불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전국에 이민 모집 광고가 유포됐는데, 여기에는 멕시코 땅이 푸르른 황금밭에서 떼돈을 벌 수 있는 지상낙원으로 묘사됐으며, 어느 누가 가더라도 큰돈을 벌어 4년 후에는 고향에 돌아올 수 있다는 사탕발림의 약속이 돼 있었다.3) 그리고 이에 곁들여 어린이가 7살이 되면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어떤 식으로 고임금을 지불할 지에 대한 방법이 설명되어 있었으며, 계약 만기 후, 더 머무르던지 귀국하던지 하는 것은 본인의사에 달렸으며, 재계약 시는 상여금까지 받을 수 있다는 등 모두가 달콤하고 현혹되기 쉬운 문구들로 가득했다. 위 광고문 내용에서 보듯이 당시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멕시코가 미국(즉 하와이)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으며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이민이라는 것은 1902년에 시작된 하와이 이민만을 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어린이 196명(257 가족 + 독신자 196명), 총 1,033명의 한국인들이 이민 모집광고가 난 지 6개월도 채 못된 기간 동안에 서울, 평양, 수원 등 전국 18개 지역에서 쉽게 모집됐다(Patterson: 1983, p.40). 이민에 응모한 사람들의 성분을 보면 농민이나 몰락한 양반계층들, 하급관리들, 노동자, 불량배 등으로 구성돼 있었고, 대한제국의 구광무군 출신들, 그리고 부산 출신의 어부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렇게 모집된 1,033명의 한국인들이 1905년 4월 4일 인천항을 출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멕시코로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비극의 중남미 한인 이민사의 시초인 것이다.

 

같은 해 8월, 메리다에 거주하는 호후라는 한 중국인의 편지, 고려인삼을 멕시코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팔려고 메리다 지방까지 우연히 가게 됐다가 한국인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한 재미교포 박영순의 편지 등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공립협회’에 전해짐으로써, 조선 정부가 멕시코에 간 한국인 이민들이 학대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직책으로 외부협변(지금의 외무부 차관격)이었던 윤치호를 특사로 멕시코에 파견, 한국인들의 학대 실상을 알아보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공작 및 저지로 실현되지 못한다. 

 

이 시기는 한국에서 일본의 고문정치(顧問政治)가 실시된 시기로서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와 친일파였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재정, 외교의 실권을 장악, 조선 정부는 자국 외교관 하나를 해외로 보내는데도 일일이 이들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윤치호는 고종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하와이까지는 갈 수 있었으나 멕시코로 갈 여비를 본국으로부터 송금받지 못해, 멕시코를 목전에 둔 하와이까지만 가서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당시 일본의 입장은 윤치호의 멕시코 방문으로 야기될지도 모르는 일본과 멕시코 사이의 외교분쟁을 막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윤치호의 파견 결정을 조선 정부의 독자적인 외교권 행사의 강화시도책으로 간주, 갖은 수단을 써서 저지했던 것이다.4) 

 

한국인 이민들이 인천항을 떠난 지 반년 후, 그리고 윤치호가 서울로 귀환한 지 3주 후인 1905년 11월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조선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했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화했다. 그로부터 멕시코의 한국인들은 우리들에게서 완전히 버려졌고 멀어져 갔다. 

 

1,033명의 한국인 이민들을 태운 영국 국적의 ‘샌 일포드(S.S. Ilford)’호는 인천을 출항, 장장 1개월 반 동안 태평양을 여행한 다음 1905년 5월 13일 태평양 연안의 멕시코 살리나크루스(Salinacruz) 항에 도착했고, 거기서 한국인들은 기차로 멕시코 만에 면한 코앗사코알코스(Coatzacoalcos) 항구로 이동, 다시 여기에서 선편으로 ‘진보’라는 의미의 '프로그레소(Progreso) 항구로 옮겨졌다. 멕시코로 향하는 태평양 상에서 성인 2명이 배 안에서 병으로 죽어 시체를 태평양에 수장(水漿)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금 확인할 길이 없다.5) 어찌 됐건 프로그레소 항구에서 다시 기차로 메리다에 도착한 한국인 이민들은 농장의 규모에 따라 몇 사람부터 몇백 명의 그룹별로 나뉘어 유카탄 전역에 퍼져 있었던 22개(또는 24개)의 농장으로 분산되어, 흩어졌다. 그리고는 채찍, 무더위, 굶주림 속에서 4년간의 강제노동을 시작했다. 멕시코 남단의 유카탄 반도, 한때는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에네껜 산업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바로 이 일단의 한인들이 에네껜 농장의 노동자로 채찍, 무더위, 굶주림 속에서 4년간의 강제노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III. 에네껜-황금과 가시

 

혹시 멕시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애니깽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은 국적이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애니깽이라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야어로 에네껜이다. 지금도 멕시코 남부 마야 지방에서는 이 에네껜으로 노끈이나 밧줄, 가방을 만들어 쓰기도 하지만 이제 에네껜 산업은 완전히 몰락한 중남미 특유의 모노 컬처 산업이었다. 

 

19세기 말, 마야의 주 무대였던 유카탄 반도에서는 이 에네껜을 대대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수요는 무궁무진한데 이 에네껜 잎을 채취할 노동력이 언제나 부족했다는 점이다. 마야인들은 사실 체력적으로 약한 종족이다. 바로 이 에네껜 강제노동과 혹사로 인해 그들은 대규모로 죽어갔었다. 그러자 원주민 노동자들 대신 멕시코 농장주들은 눈을 해외로 돌리게 되는데 한국인들이 바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멕시코로 오게 되는 것이다. 

 

에네껜 잎사귀 하나하나는 다육질의 잎으로서 아주 두껍고, 다 성장한 에네껜 잎의 길이는 2미터 이상이다. 잎 꼭대기와 양옆으로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무수히 솟아있다. 당시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노동자들의 주된 노동은 마체테6)를 가지고 이런 에네껜 잎을 자르는 것이었다. 우선 에네껜 잎사귀의 단단한 밑동을 베어낸 다음 가시를 제거하고 잘린 잎사귀들을 50개씩 묶어 한 다발을 만든다. 이 다발들은 농장의 십장들로부터 이상 유무를 검사받은 후 노새가 끄는 무개화차7)로 옮겨진다. 이 일이 에네껜 노동의 처음과 끝이었다. 

 

에네껜 노동이란 사실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너무도 힘든 노동이었다. 보통 에네껜 나무 하나는 오십 내지 백 개 정도의 잎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가장 큰 잎사귀를 베어내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에네껜 잎에 수없이 돋아난 가시들 때문에 한인 노동자들은 많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이 한인들을 그렇게도 울렸던 것이다. 에네껜 플랜테이션의 주인들에게는 황금을 가져다주었고, 노동자들에게는 한없는 눈물을 선사한 가시 돋친 황금이 바로 에네껜이었던 것이다. 

 

한국인 이민들은 에네껜 따는 일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저 배추나 재배하고 수확하는 정도의 쉽고 간단한 노동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1905년 갓난아기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 멕시코에 온 최병덕 선생8)이 손수 쓴 유일하고도 귀중한 기록물인 『회상-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인들의 삶과 노동 Memorias de la vida y obra de los coreanos en México desde Yucatán(México, 1973)』이라는 책에서 그 당시 한국인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우리들은 손이 엉망이 됐는데, 특히 왼손은 에네껜 가시나 가시덤불에 찔리고 긁혀 피가 멈출 날이 하루도 없었다. 발 부분도 마찬가지였는데, 즉 발가락부터 무릎까지 온통 가시에 찔려 항상 몸이 엉망진창이 됐으며, 가시에 엉겨 붙은 채 집에 돌아와서는 가시를 빼고 상처를 만졌다. 우리들이 집에 돌아와서 유일하게 서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얼굴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머리엔 항상 밀짚모자를 덮어썼고, 온몸은 장갑이나 각반으로 가렸기 때문이었다.” 

 

매일 주어진 할당량은 인간으로선 도저히 끝낼 수 없고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래서 부인네들, 심지어 어린애들까지도 도우러 밭으로 나갔다고 한다. 

 

멕시코 북부 티후아나에서 이제 조용히 남은 여생을 보내시고 있는 김대순(1907년생), 김대녀(1910년생) 할머니 자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저희들이 아버지로부터 들었는데 하루에 주어진 일의 양이 너무 많아 그걸 끝내지 못하면 농장주인한테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노예지, 내가 노예야’ 이렇게 아버지가 말하면서 우시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희들 어머니도 농장에 나가 에네껜을 땄습니다. 새벽 4시에 나가 오후 4시나 5시에 돌아오시곤 했지요.” 

 

당시 메리다에 거주했던 중국인 호후라는 사람의 편지는 우리 동포들이 겪었던 비극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누더기 옷과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멕시코인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눈물 없이는 이들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떼를 지어 에네껜 농장에서 일했는데, 부인네들은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동물 이하의 생활 같았다. 여기 멕시코에서는 토착 원주민을 세계 제5위, 또는 제6위 노예에 속한다고 부르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은 제7등 노예로 불려졌었다. 이들이 작업 목표량을 다 달성치 못했을 때는 무릎을 꿇게 하여 피가 날 때까지 못살게 굴었다.” 

 

당시 유카탄 반도의 광활한 에네껜 플랜테이션은 50명의 소왕(小王)이라고 불린 대농장주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카탄 주의 총인구는 약 30만 명 정도였는데 에네껜 플란테이션에서 일했던 10만 명 정도의 농장 노동자가 노예였다는 것이다. 

 

1908년 미국인 작가 존 케네스 터너(John Kenneth Turner)는 유카탄 반도를 돌아보고 거기 에네껜 플란테이션에서 일했던 농장 노동자들의 참상과 농장주들의 착취 및 횡포를 고발한 그의 보고문 『멕시코․ 야만 México Bárbaro』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예로서는 소노라주에서 잡혀 온 야키족 8,000명, 3,000명의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이 땅의 소유자였던 10만에서 12만 5천에 이르는 마야 원주민이 있었다.” 

 

모집 광고문을 보고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한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예로 모집광고에는 임금은 하루에 1원 30전, 숙련된 사람이라면 하루에 3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선전돼 있었지만 필자가 뒤에 여러 2세 동포분들로부터 들은 증언에 의하면 15~18전이 고작이었고 온 힘을 다 쏟아 주어진 양을 끝냈다 하더라도 농장 측에서는 갖은 구실을 다 붙여 뺏어가 많이 받아봐야 30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부터 같이 따라온 한국인 통역관은 농장주 측에 붙어 한국인들에게 불리한 통역도 서슴지 않았으며, 충성심을 발휘하느라 한국인을 상대로 자신이 먼저 채찍을 들기도 하는 등 한마디로 못된 짓은 골라 다하며 횡포를 부렸다. 가장 악질적인 통역으로는 권병숙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 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하며 농장주의 충실한 주구로서 갖은 횡포를 자행해 한국인들로부터 “저 권이라는 놈이 우리를 팔아먹었다”는 원성을 듣고 있었으며, 또 다른 통역관 이준혁과 함께 가장 악명 높은 자였다. 

 

이런 상황 아래서 도주를 시도하는 한국인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체포됐고 다시 잡혀 왔다. 한국 사람 중에 누군가가 도망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각 농장주들은 연합을 해서 추적대를 구성, 그 이튿날이면 그들은 영락없이 도망자를 잡을 수 있었다. 지리도 모르고 언어소통도 안되고 설사 멀리 도망쳤다 하더라고 가시덤불 밀림 속에서 그들이 갈 안전한 장소는 없었던 것이다. 탈출하다 잡혀 온 사람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잔인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그들은 우선 도망자를 토굴이나 감옥에 하룻밤 가두어 놓은 다음, 그 이튿날 아침, 농장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도망갔다 잡혀 온 사람을 땅바닥에 엎어놓고, 옷을 벗겨 놓은 다음, 치코텐9) 채찍으로 내리쳤다. 채찍질을 하기 전 미리 오렌지와 소금을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상처에 바를 약품 대용이었다. 어느 농장이고 가릴 것 없이 도망자에 대해 이와 같은 린치를 가했는데 기본적으로 가하는 채찍 수는 항상 12대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민 1명에 대해 여비 및 수수료 조로 약 200달러의 비용을 고용주가 부담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농장주들의 도망 방지책은 매우 엄중했다. 농장의 모든 노동자들은 한마디로 농장주의 사유물이었던 것이다. 

 

농장에서의 힘든 노동 말고도 한국인 이민자들이 겪었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음식 문제였다. 밥과 김치를 먹던 사람들에게 여기 멕시코 사람들의 주식인, 우리 입에는 맞지도 않고 깔깔하기 그지없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었어야 했으니 알만하다. 그나마 이런 음식도 한국인들에게는 늘 부족했다. 게다가 멕시코는 강이 거의 없어 지하수를 사용하는데 이 물은 아메바가 많아 한국인들이 설사를 하거나 배탈 나기에 딱 알맞았다. 후에 2세 동포들부터는 마시기 시작했지만 커피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김대녀 할머니에 의하면 자기 어머니는 유카탄 농장에 도착했을 때 옥수수가루로 만든 토르티야를 먹지 못했고 해먹에서 잠을 자야 했다는데 이런 것들이 그녀를 늘 울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언제나 배가 고팠지요. 정말 입에 풀칠만 하는 것도 어려웠지요. 아침은 타말10), 점심으로는 토르티야를 매일 먹었고 커피가 없어 맛대가리 없는 토르티야를 태워, 거기에 물을 넣고 끓인 다음 숭늉처럼 만들어 먹었지요.” 이런 빈궁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적지 않은 수의 한국 사람들, 특히 부인들이 자살을 많이 하게 된다. 

 

1988년 1월 메리다에서 만난, 텔마․리(Telma Lee, 69세. 한국명은 이덕순(李德順))여사의 친할머니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 당시, 한국을 떠나기 전 멕시코와 미국을 구별 못했다던 할아버지, 꽤나 낭만적이셨던 분으로 “멕시코 가서 4년만 모험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보자”라고 가족, 친구, 친지들에게 소리쳤다는 이종호 할아버지. 이 이종호 씨를 따라 유카탄에 온 이덕순 여사의 할머니는 결국 농자의 가혹한 노동,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석유를 먹고 자살하는 것이다. 

 

메리다의 한 2세 동포는 찾아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 시절을 간결하게 결론지었다. 

 

“이렇게 힘들게 노동하며 살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1세분들은 모두들 일찍 돌아가셨지요.”11)

 

1909년, 4년으로 정해진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한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에네껜 일에만 해 온 한인들에게 이런 추상적 자유는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메리다 시로 나와 상업에 종사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시엔다(hacienda)에 종속된 채 이전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한인 노동자들은 원주민 노동자들에 비해서 농장주들에게는 아주 인기가 있었다. 우선 몸도 건장하고, 열심히 일했을 뿐만 아니라 또 순종적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한편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인들을 포함하여 동양에서 온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경쟁자들이었고 또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맥락 속에서 1910년의 멕시코 혁명은 모든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급변시켰다. 기존의 농장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지배세력들이 무너지고 농민, 노동자 및 중산층에 기반 한 혁명세력이 등장하면서 한인들을 포함한 동양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사회적으로 더욱 커져만 갔다. 이런 멕시코의 상황이 강요하는 새로운 압력 앞에서 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부적으로 한인사회가 더욱 결속하는 것이었고12), 또 하나는 멕시코를 제외한 다른 중남미 지역으로의 재이주였다. 그것의 최초의 이주지가 바로 쿠바인 것이다. 

 

 

 

이 책은 쿠바 이민자 후손인 Martha Lim 교수가 쓴 

쿠바 한인 이민사 입니다. 

 

 

 

 

IV. 사탕수수의 꿈은 사라지고-쿠바로의 이주 

 

한국인들이 쿠바에 가기 전, 이미 쿠바에는 중국인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그 기간은 대충 1850년에서 1870년대 사이로 그들 대부분은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농장 등에서 일을 했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1866년 전체 쿠바 인구 140만 명 가운데 중국인의 숫자가 3만 2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인들 다음으로 이주해 온 이들은 일본인들로서 그들은 1898년부터 1926년까지 약 10여 차례에 걸쳐 천여 명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계약 노동자로 쿠바에 입국했다(이자경: 1998, p.489). 한국인들이 쿠바로 들어간 것은 1921년이다. 1905년에 멕시코로 이주한 1,033명의 한인들 중 일부가 멕시코의 에네껜 농장 일을 그만두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러 쿠바로 떠났다가 거기서 주저앉았고 이들의 후손이 바로 쿠바의 꼬레아노(coreano)인 것이다.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쿠바에는 설탕 붐이 있었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당시 아바나에 이미 가 있던 이화룡13)이라는 계약 알선업자는 마나티 플랜테이션의 농장주들과 계약을 맺었고 그 소식을 들은 유카탄의 한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몰려들었다. 1921년 1월 이화룡은 288명의 한인들을 모아 쿠바로 향했다. 이민자들은 마나티 항구에 도착을 했는데, 기록을 보면 그들은 입국 수속을 받지 못하고 17일간 배에 머물렀었다고 한다. 이 사태의 원인은 당시 쿠바 정부가 그들을 일본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14)

 

쿠바에 온 한인들은 계약에 따라 마나티 사탕수수 농장에서 집단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탕수수 농장 일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작업량은 줄고 노임 역시 형편없는 수준으로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국제 설탕 가격이 폭락했던 것이 주원인이었던 것이다. 2주 직전까지만 해도 설탕 가격이 좋았다가 곧바로 십 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 타격은 곧바로 한인 노동자들에게 전가되었다. 임금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기야 농장들이 생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졸지에 일감을 잃은 한인들은 다시 흩어지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마탄사스 에네껜 농장에서 일손을 구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921년 5월 31일 일단의 한인들이 마탄사스로 이주한다. 그 이래 마탄사스 농장 지역은 쿠바 한인들의 근거지로 자리 잡게 되고 지금도 그곳에는 여전히 한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후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마탄사스뿐만 아니라 카르데나스, 그리고 아바나 지역으로 한인들이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마탄사스 이주 얼마 후 아바나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식민지 재외국민도 일본 재외국민으로 고려해 등록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한인들은 완강하게 등록을 거부했다고 기록에 나오는데 이때의 사건을 계기로 한인들은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기구들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재쿠바국민회인 것이다.15) 바로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대한국민회 쿠바 지부로 보면 될 것이다. 당시 재쿠바국민회가 펼쳤던 주요 사업으로는 조국광복 사업, 교육사업, 구제사업, 쿠바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사업 등이 있었다. 

 

쿠바에 국민회가 결성된 것은 1921년 6월로 알려지고 있으나 마탄사스 정부 자료에 의하면 같은 해 11월 1일 창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임은조: 1995, p.422). 지금도 남아있는 창립 보고서를 보면 앞으로 한인끼리 상부상조하고 교육 및 문화사업을 펼칠 것이라는 등의 국민 회칙이 첨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회계기록을 보면 교육비가 많이 지출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인들이 쿠바 사회와 단절된 채 농장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어렵게 살면서도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2세 교육에 힘써 왔음을 말해준다. 

 

당시 쿠바에 새워진 최초의 한인학교는 <민성학원>이라는 학교였다. 그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한국말을 배웠다. <재쿠바 국민회>가 설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규모로 국어교육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체계를 갖춘 국어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1923년에 들어와서이다. 당시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에서 지원한 돈으로 본격적인 국어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미국과 쿠바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과 쿠바의 국민회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협력했다. 재미국민회는 재쿠바국민회에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지원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단체 조직과 운영까지 망라한 전반적인 것이었다. 재미국민회는 또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돼 임시정부의 지침을 받아 여러 지역에 연락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당시 쿠바에는 국민회 청년부와 대한여자애국단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의 활동은 미미했고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던 탓에 한인들의 참여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이자경: 1998, p.495-504).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쿠바의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실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기록을 보면 한인들은 1937년부터 39년까지 3백60달러의 기금을 모아 미주 국민회총회로 송부했고 또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립자금으로 9백29달러를 총회에 납부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독립자금 명목으로 2백46달러를 모아 아바나 소재 중국은행을 통해서 중경의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당시 쿠바 국민회는 개설 이후 1945년까지 경상비, 교육비, 구제비, 외교비 등으로 총 2만 여 달러를 모금해 집행했으며, 조국광복을 위한 것으로만 1937년 모금을 시작해 1945년 해방되기까지 1천4백89달러를 모아 송금한 것으로 되어있다.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쿠바의 한인사회도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내적으로는 연합국의 적국인 일본인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하여 자구책을 모색했고, 대외적으로는 쿠바 정부에 협조,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공동의 적(쿠바 역시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주축국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임을 확인하는 각종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그동안 세 지역에 산재한 국민회 쿠바 지부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재큐한족단’이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조직을 통해서 쿠바한인회는 한국인의 광복 의지 및 자신들이 일본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는데 힘을 썼었다(임천택: p.14-1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되자 한인사회는 광복을 기리는 시위 행렬을 벌였고 또 대일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를 벌이는 등 각종 집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그리 변한 것이 없었다. 사실 광복 후 쿠바의 한인사회는 당시 쿠바의 외국인 고용차별정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많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척 및 노동 정지 사태는 마차도 정부를 실각시킨 산 마르틴 혁명정부 때부터 시작해 바티스타가 재집권해서 물러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쿠바 국적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동법의 강화로 인해 쿠바 국적을 그때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던 한인들은 취업 및 고용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몇몇 한인들이 쿠바 국적을 취득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무국적자로 남게 되었다. 친미적이었던 바티스타의 미국 우선 정책, 그리고 진주만 사태 등으로 전시기간 중 한인들은 신분을 보장받았으나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사라지지 않았다(임천택: p.24-25). 전쟁이 끝나고 그 흥분상태가 가라앉자, 이 시기 많은 한인들이 쿠바 국적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자신들의 생존권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쿠바 한인사회 사람들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현지인들로부터 노동차별의 불이익을 더 이상 감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 시기 많은 한인들이 쿠바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2세 및 3세들에 대한 한글교육과 한인사회 활동은 여전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시기는 한인사회에서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한국 정부는 한국 정부를 승인해준 중남미 정부에 감사의 표시로 대표단을 파견했었는데 이때 김동성 특사가 쿠바를 친선 방문한 것도 지금의 쿠바와 한국의 오래된 외교적 단절 관계를 생각해 볼 때 흥미롭다. 그러나 이런 희망적인 조짐도 잠시, 이번에는 쿠바 혁명으로 인해 한인사회는 그 기반부터 흔들리게 된다.  

 

1959년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하면서 조그만 섬나라 쿠바에서 중남미 최초로 무력에 의한 혁명이 성공하게 된다.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후 제 일차로 시작한 것이 바로 토지 혁명이었다. 카스트로 혁명정부의 토지 혁명은 사실 멕시코처럼 농민들의 갈등에서 비롯된 혁명이 아니라 순전히 정부 주도하에서 쿠바 경제와 산업발전을 위해 행해진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을 위시한 외국인들과 이들에 기생한 매판자본가들의 배만을 불려주었던 대토지 소유제도의 금지와 소작 노동 금지, 그리고 개인 소유의 토지가 일정한 규모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토지소유 제한 및 외국인과 공공회사의 토지소유 금지법을 선포했다. 

 

이런 토지개혁법 아래에서 부자들의 사유재산은 동결되거나 몰수당했는데, 당시 중산층이었던 몇몇 한인 상인들에게도 이 법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몇몇 한인들이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자 탄압이나 강제 망명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찌 됐든 바티스타 정부에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한인사회는 1938년 미국 방문을 끝내고 들어온 바티스타 대통령의 환영식에 참가했고, 그가 재선운동을 벌일 때도 국민회의 이름으로 환영가두행렬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위에 말한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기록이나 증언을 통해서 모든 재산을 포기한 채 강제로 망명을 떠나거나 심지어 쿠바 안에서 투옥된 사례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가난하게 살던 한인들에게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체제는 환영받을만한 것이었다. 기록이나 증언을 보면 당시 한인 후손들 중에서 혁명에 참가, 에네껜 농장의 한인 노동자들을 규합, 바티스타 정부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지방 공산당원이 있고 또 피그만 전투에 참가한 한인도 있었다고 한다(이자경: 1998, p.523-533). 

 

반복하지만 쿠바 혁명은 한인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쿠바에 정착한 이후 40년 넘게 대한국민회 쿠바 지부로서 동포들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었던 쿠바한인회가 혁명정부 아래서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쿠바한인회에 북한이 진출하면서 북한대사관이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1960년 쿠바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구 소련이나 중국, 동구 및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와 외교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쿠바 한인사회에도 변화가 왔다. 1961년 2월에는 쿠바와 북한이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아바나에 재쿠바 북한대사관이 개설되었고 북한 외교관들과 한인사회의 대표들이 회합을 갖는 등 사태는 발전되어갔다. 

 

북한에 대한 쿠바의 호혜 정책으로 한인사회의 사람들이 쿠바 정부에 협력했던 사실도 기록에 나온다. 한편 북한은 재쿠바 한인들에게 재일교포에게 그랬던 것처럼 북한에 가서 살 것을 제의했다고 하기도 하며(코보리: 1996, p.226) 실제로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때 쿠바를 탈출한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은 멕시코와 중남미로 떠났고, 여러 번에 걸친 난민 탈출 때 같이 나와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V. 맺는말

 

지금 쿠바에 살고 있는 한인 후손들의 숫자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략 5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집계는 아니다. 아마도 언젠가 한국과 쿠바가 외교관계를 맺는다면 쿠바 이민에 대한 실태조사가 제일 먼저 시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쿠바 한인들에 관한 정보는 아마도 북한대사관이 많이 가지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남북이 화해의 국면으로 들어서고 조금씩 통일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지금, 쿠바 한인의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하거나 지체될 수 없는 민족사업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95년 임은조씨16)가 ‘95 한민족대회’ 때 쿠바동포들을 인솔하고 한국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그와 같은 교류가 빈번해지고 또 그것이 활성화되어 양국 관계에 희망적인 조짐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쿠바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 동포들 역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민족 정체성의 문제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당시 쿠바 한인들은 친척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부모들이 자식들의 배우자로 한인들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풍경을 상상하기 어렵다. 동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아 서로 연락할 길도 없고 그마저 쿠바 사회에 동화돼버려 순수한 한인을 배필로 맞이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어 교육문제도 이런 민족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시급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쿠바 이민과 관련하여 1, 2세 동포들의 구체적인 발자취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망각인 상태로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이다. 생존해 계신 한인 후손들도 이제는 얼마 없다. 시간은 지금 살아 계신 그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더 흐르면 이 소규모의 이민 사건은 아마도 20세기 초엽의 자그마한 한 사건 정도로나 기억될지 모를 일이다. 쿠바 정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한인 후손들의 삶의 발자취를 살피는 것도 어렵다. 현재 여건상 쿠바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없어 자세한 상황이 밝혀진 게 없지만 언젠가는 거기 계신 동포분들의 생활상도 하루빨리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어찌 됐든 멕시코 이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쿠바 한인 이민은 결과적으로 우리들에게는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우선 이와 같은 고난의 근대사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분들이 겪었던 고난의 삶과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이것을 통해 불행했던 쿠바 한인 이민 사건이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서 원위치를 찾아가게끔 해야 하고 동시에, 또 그 실상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재조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의무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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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erson, Wayne, “Korean Inmigration to the Yucatan at the Turn of the Century: The Diplomatic Cosequences”, 24th Annual Convention of the 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Mexico, D.F., 1983 April). 

Sánchez Pak, José, Memorias de la vida y obra de los coreanos en México desde Yucatán, México, Publicación de Relaciones Exteriores, 1973. 

Valdés Lakowsky, Vera, Vinculaciones sino-mexicano, México, U.N.A.M., 1981. 

 

 

 

 

【Resumen】

 

La historia de los inmigrantes coreanos en Cuba 

 

Suh, Sung-Chul

 

El número de los coreanos residentes en el extranjero se aproxima a 5.700 millones. Hasta ahora los inmigrantes coreanos residentes en China, Rusia, los Estados Unidos y Japón han recibido atenciones especiales y se les han hecho numerosos estudios, los cuales aun siguen siendo muy activos. Sin embargo, los que se establecieron en otra vasta región que conocemos como América Central y del Sur han sido tratados con menos interés e indiferentemente. Pero la historia de la inmigración coreana no puede tener su verdadero significado sin tener en cuenta las inmigraciones a Hawai y a México a principios del siglo XX y en 1905, respectivamente. 

 

A pesar de la importancia de los hechos mencionados, se puede decir que casi no existen estudios sobre la inmigración a México en 1905, y a Cuba, en relación con la primera. La falta de relaciones diplomáticas entre Corea y Cuba también se presenta como uno de los obstáculos que impide el avance de estudios sobre temas relacionados. Bajo esta situación de indiferencia y abandono, los coreanos en Cuba fueron quedándose en el olvido y, de esta manera, también desapareció una parte de nuestra historia. 

 

Es imposible estimar el número exacto de los descendientes coreanos residentes en Cuba. Se cree que viven aproximadamente unas 500 personas. Si se llega a mejorar algún día las relaciones entre Corea y Cuba, lo primero que se debe hacer será llevar a cabo estudios reales sobre los descendientes coreanos. Nuestros compatriotas en Cuba llevan una vida difícil por problemas económicos que se están teniendo lugar en Cuba. También se va perdiendo más y más las huellas de la identidad nacional. Con respecto a este hecho, surge el problema concerniente a la educación de lengua coreana. Es un tema que merece una atención inmediata. Ya nos es imposible encontrar los rastros de nuestros compatriotas de primera y segunda generación. Tampoco quedan muchos descendientes que han sobrevivido. 

 

Esta tesis fue escrita con el deseo de llamar la atención sobre la importancia de la inmigración coreana a Cuba que debe ser restituida como parte de nuestra historia y que sea evaluada la realidad de la inmigración con el debido respeto que se mere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