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 특별기획|코리안 디아스포라⑤ 쿠바]
사탕수수밭의 가난 · 이별 그리고 恨
“카스트로 혁명으로 차별 이겼지만 韓人 정체성 잃고 말마저 잊어”
쿠바 아바나=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지난 3월로 쿠바 이민사는 84년을 맞았다. 그 84년이라는 세월의 두께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억척같은 생존 의지로 켜켜이 다져졌다. 두고 온 고국의 산하를 그리워하기는커녕 생존에 급했던 나날들이었다.
쿠바 이민사는 수탈과 눈물, 생존의 몸부림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인 恨의 역사다.카스트로의 쿠바혁명 뒤 높아진 교육 기회에도 불구하고 쿠바 한인들 대부분은 가난을 대물림한 모습이다.
1921년 3월 274명의 조국 잃은 유랑민이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 닿았다. 노예노동이나 다름없던 멕시코에서의 고단한 삶을 청산하고,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였다. 그로부터 쿠바 이민사는 올해로 84년이다.
84년. 30년을 한 세대로 보면 세 세대가 죽고 태어날 만큼 쌓인 세월의 두께다. 1921년 아버지 손을 잡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작은 항구를 떠났던 코흘리개는 이제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 그러니까 쿠바 한인은 모두 쿠바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숫자는 약 750명쯤 된다.
우리말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이들은 노년층 몇 명을 빼고는 없다. 우리의 쿠바 이민사는 생존의 몸부림과 두고온 고국 땅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인 한(恨)의 역사다. 생존이 먼저였던 만큼 우리말을 배우는 것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한국인이 쿠바 땅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05년 한반도에서 멕시코 농업노동자로 옮겨간 1,033명의 한국인 가운데 일부가 쿠바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으로 보인다.
그 무렵 쿠바에서는 늘어나는 설탕 수요를 대기 위해 (대부분이 미국인 소유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인력이 모자라던 판이었다. 이에 따라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애니깽(애네켄·Henequen)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 가운데 일부가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쿠바로 가는 배를 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한민보> 1920년 9월30일자에 실린 “쿠바에 재류하는 이해영 씨는 1918년 12월30일에 득남하였다”는 기사는 이미 그 무렵 쿠바 땅에 우리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해영은 쿠바 아바나 항구에서 장사를 했다고 알려졌을 뿐, 언제 쿠바로 옮겨 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쿠바 현지 취재 과정에서 이해영의 자손이 있는가를 한인 후손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1921년 3월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쿠바 땅을 밟은 것은 쿠바 농장주들에게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인 노동자들을 데려오겠다는 이해영의 말이 받아들여진 뒤의 일이다.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서 쿠바 사탕수수밭으로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2003년 펴낸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3, 멕시코·쿠바>(김호일·김도형·김형목 공동집필) 자료에 따르면 이해영은 1921년 2월 베라크루스·프론테라·프로그레소 등 유카탄 반도의 멕시코 항구들을 돌며 모두 274명의 한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모아 3월6일 쿠바로 떠났다. 그리고 닷새 만인 3월11일 쿠바 남쪽의 마나티 항구에 닿았다.
그러나 우리 한인 선조들의 쿠바행이 이즈음처럼 돈가방 싸들고 해외 나들이하듯 첫발부터 가볍고 산뜻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쿠바 이민국에서 정부의 명령 없이 노동자의 입국을 허가할 수 없다고 하여 한 이민병원에서 6일 동안 검사받아야 했다. 그런 뒤에도 여권 문제로 타고 온 배에 묶여 있다 어렵사리 마나티 지방에 발을 내디뎠다.
쿠바 이주 한인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탕수수밭의 중노동과 저임금이었다. 쿠바 한인사회의 중심인물인 헤르니모 임(79·상자기사 참조)은 부모로부터 들은 그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쿠바 마나티 지방에 내린 우리 할아버지 일행은 처음에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농업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임금이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우리 한인들은 멕시코에서 애니깽 농장에서 일한 경험은 있었어도 사탕수수밭 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운이 나쁘게도 국제 설탕값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일감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노임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지자 일부는 이럴 바에는 멕시코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마나티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 일이 기대했던 만큼 풀리지 않자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쿠바에 닿은 지 2개월 만에(1921년 5월) 마탄사스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애니깽(Henequen). 쿠바의 한국인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인장과에 드는 열대성 식물 이름인 애니깽은 고기잡이할 때 쓰는 밧줄을 만드는 원료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선박 운송량이 늘어나자 애니깽은 필리핀 마닐라삼과 더불어 세계 밧줄시장을 양분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인조섬유가 개발되면서 애니깽 농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현재는 쿠바에서도 애니깽 농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쿠바로 옮겨간 우리 한인 노동자들은 애니깽을 ‘어저귀’라고 불렀다. 문제는 애니깽이 억센 가시로 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멕시코와 쿠바로 떠난 우리 한인 선조들은 가시투성이 애니깽을 자르다 찔려 피를 흘리며 노예나 다름없는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마탄사스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북쪽으로 80km쯤 떨어진 지역. 마나티에서 끼니를 거르며 어렵게 살던 한인들은 그곳 마탄사스의 한 애니깽 농장에서 인력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집단이주했다. 그 농장 이름은 엘 볼로(El Bolo).
아바나에서 헤르니모 임과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장, 그리고 통역 겸 안내자인 줄리 문(문은례)과 함께 마탄사스를 향해 떠났다. 목표는 엘 볼로 농장. 지금은 애니깽을 재배하지 않고 농장도 문을 닫았지만, 1920년대 중반에는 100여 가구의 한인들이 이국땅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나갔던 곳이다. 농장은 마탄사스 시내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말이 농장이지, 지금은 덤불만 우거진 상태다.
헤르니모 임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한 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가난 속에서도 독립운동성금 보내
“저 건물은 마을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방 두 칸짜리 집으로, 혼자 사는 한인 노동자들의 집단 숙소로 쓰였다. 그리고 그 옆 공터에서 채소를 길러 김치를 담가 먹고는 했다. 그곳 공터는 한인 노동자들이 모이는 일종의 공회장소였다. 밤이면 가스 등불 아래서 음악회니 무용회를 열어 이국땅에서의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쿠바의 초기 이주 한인들은 그곳에서도 나라 잃은 설움을 겪어야 했다. 마탄사스 애니깽 농장에서 한인들이 노동자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쿠바 아바나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는 “조선 식민지 재외국인도 일본의 재외국민으로 등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신한민보> 1921년 7월14일자 ‘쿠바지방 동포의 소식’ 기사).
그런 말을 들은 마탄사스 한인들은 그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1921년 6월 대한인 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설립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 국민회 본부에 지부로 승인해 주기를 요청했다. 미주 국민회는 300원을 보내 회관을 구입하도록 도왔다. 쿠바 지방회는 해마다 3·1절을 맞아 그곳에서 기념행사를 갖고는 했다.
헤르니모 임의 부친 임천택은 한인사(韓人史)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임천택이 1954년 발표한 ‘쿠바한인이민력사’(태평양주보사 펴냄)는 그의 딸 마르타 임(전 마탄사스 종합대 철학교수)과 사위 라울 루이스(전 마탄사스 종합대 박물관장)가 함께 쓴 <쿠바 속의 한국인(Coreanos en Cuba)>이 2000년 스페인어로 출판되기까지 한인 이민사를 담은 주요한 책자로 꼽혔다.
그는 1903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년 뒤 홀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로 떠났다. 그러다 18세 때인 1921년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쿠바로 옮겨갔다. 쿠바 마탄사스 엘 볼로 농장에 터를 잡은 임천택은 국민회 간부를 맡으면서 한인들의 단결과 복지, 독립운동자금 모금 등에 힘썼다. 마탄사스 민성국어학교장으로서 어린이들의 우리말 교육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이런 공로로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쿠바 지방회가 만들어진 3개월 뒤, 한인들의 최초 상륙 지점인 마나티에 남아 있던 한인 30여 명이 중심이 돼 마나티 국민회가 만들어졌다(1921년 9월). 마나티에서 마탄사스로 옮겨온 일부 한인은 그곳 엘 볼로 농장의 일자리가 부족해져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쿠바 북부의 무역항인 카르데나스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30여 명의 한인이 중심이 돼 카르데나스 지방회를 조직했다(1922년 3월).
최초 상륙 지점인 마나티, 2차 이주지역인 마탄사스, 그리고 3차인 카르데나스, 이렇게 세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쿠바의 가난한 한인 노동자들이 한 푼 두 푼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기부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멕시코·쿠바> 자료에 따르면, 쿠바의 한인들은 미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1937년부터 1944년까지 1,289달러의 성금을 모아 국민회 중앙총회로 보냈다. 아울러 246달러를 따로 모아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주석에게 보냈다. 쿠바 아바나에 있는 중국계 은행을 통해서였다.
헤로니모 임은 “그 무렵 1달러라면 이즈음의 100달러의 값어치를 지녔다는 측면, 그리고 어려웠던 쿠바 한인들의 살림살이 형편을 떠올리면 결코 적은 돈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날마다 쌀 한 숟가락씩 아껴 모았다 팔아 돈을 마련해 냈다는 얘기다.
그 무렵 한인 노동자들은 워낙 가난해 누가 죽어도 관조차 살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높은 이잣돈을 빌려 관을 사 장례를 치르고는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몇 달을 밤늦도록 일하고는 했다. 마탄사스 지역에서 가난한 한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이자놀이를 해 돈을 번 사람은 같은 이주 노동자 출신이다. 그의 이름은 라몬 박(한국 이름은 박창운).
혁명 전까지는 ‘외국인’으로 차별받아
쿠바 한인들 사이에서 라몬 박이라는 이름은 한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중간에서 떼어먹고 치부한 자로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는 살 길을 찾아 멕시코에서 쿠바로 넘어온 노동자들을 농장주들에게 대주면서, 중간에서 한인들의 임금을 받아 상당부분 제 뱃속을 채웠다. 그러면서 한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라몬 박은 1959년 쿠바혁명 뒤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쿠바 한인들은 마나티·마탄사스·카르데나스 세 지역의 국민회를 합쳐 ‘재(在)쿠바 한족단’을 만들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높아진 반일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칫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생겨날지 모를 불상사를 막고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쿠바사회에 다시금 내보이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끝나자 쿠바 한인사회는 전쟁 승리와 조국 광복을 기리는 가두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저임금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우리 한인들의 생활이 나아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쿠바 한인사회는 쿠바혁명이 터지기 전까지는 친미 바티스타 정권의 뿌리 깊은 외국인 고용 차별정책으로 가난의 늪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웠다. 필자가 쿠바 현지에 머무르면서 만난 노년층 한인 후예들은 대부분 평생 빈곤 속에서 지낸 탓일까,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서 가난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쿠바의 한인들 가운데는 의사·변호사·교수 등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난을 대물림해 왔다. 아바나 구시가지인 비에하 지역의 빈민가에 사는 에스테반 안(한국 이름은 안남산·82)과 알레한드리나 주(주미엽·81) 부부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들 부부가 사는 집은 계단이 허물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다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말하자면 옥탑방 같은 곳이었다.
쿠바 날씨가 사계절 춥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사람이 살 만한 주거공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해 마음이 아팠다. 알고 보니 그 옥탑 건물은 일제시대 아바나에 살던 한인들의 모임터였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3, 멕시코·쿠바>에 따르면 그곳에서 한인들은 한 푼 두 푼 독립운동성금을 모아 미국의 대한인 국민회로 보냈다. 에스테반 안의 말에 따르면 해마다 3월1일이면 그곳에 모여 기념식과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에스테반 안 부부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는 대한 사람, 우리 아버지도 대한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멕시코 사람”이라고 밝혔다. 에스테반 안의 경우 1905년 멕시코 농업노동자로 떠났던 할아버지 안순필과 할머니 김마리아 사이에서 아버지 안국명이 나왔고, 안국명이 멕시코 여인 빅토리아 곤살리와 결혼해 쿠바로 간 직후 에스테반 안을 낳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쿠바 한인들의 최초 상륙 지점인 마나티. “나는 위로 형을 넷 두었는데, 그들은 어릴 적부터 모두 마탄사스에서 애니깽 노동자로 일했다”고 말한다. 막내인 그는 일찍이 아바나로 와서 식당에서 일하다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이즈음 에스테반 안은 얇은 비닐을 씌워 막대기에 꽂은 눈깔사탕을 파는 노점을 한다.
아프리카 앙골라는 1960년대부터 만성적인 내전에 시달려 왔다.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집권당 앙골라인민해방전선(MPLA)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군 앙골라완전독립민족연합(UNITA) 사이의 유혈투쟁이었다. 쿠바 한인 후예 가운데는 앙골라 내전에 참전한 사람도 있다.
‘고깔’이라고 일컬어지는, 마탄사스 지역의 한 작은 마을에서 만난 토마스 호 차(한국 이름은 호영길·74)가 그러했다. 그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2년 동안 쿠바군 군무원으로 앙골라에 머물렀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이념에 동조해 앙골라로 자원해서 갔다. 1960년대 초 체 게바라를 만난 적도 있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921년 쿠바로 옮겨온 274명 한인 무리 속에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호흠덕(1921년 당시 28세)이 들어 있었다. 토마스 호 차는 1930년 쿠바 마탄사스 지역의 엘 볼로 농장에서 태어났다. 호의 기억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라지고 없다. 그렇지만 “어릴 적 음식이 모두 한국식이었고, 징이나 꽹과리를 비롯해 한국 전통악기를 어른들이 두드려대던 일이 생각난다”고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한국계 쿠바인 일부 앙골라 내전에 참전하기도
엘 볼로 농장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피마자 잎으로 김치를 담가 먹었다. 호는 한국말을 잊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우리말을 알아들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우리말을 쓸 기회가 점점 사라져 지금은 거의 잊었다”며 안타까워한다. 그의 부인 로사 모레노(68)는 한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쿠바 여인이다.
쿠바 한인들이 거의 모두 우리말을 잊거나 못하는 실정에서 또렷이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아바나 남부 빈민가에 사는 루이사 박(한국 이름은 박쌍주·73·여)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뚜렷한 우리말로 “나는 밀양 박씨이고, 아버님은 박영창, 고모는 박영희와 박영록”이라고 말했다. 다만 어머니의 한국 이름은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쿠바 현지에서의 어머니 이름만 기억해 냈다.
할아버지가 마탄사스의 엘 볼로 농장에서 애니깽을 자르는 노동을 했으니, 그는 이민 3세대인 셈이다. 16년 전에 타계한 아버지 박영창은 애니깽을 원료로 선박에서 쓰이는 밧줄을 만드는 공장(미국인 소유) 노동자였다. “아버지·할아버지 하면 언제나 새벽부터 일을 나가 밤늦게 돌아오시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릴 적에는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다녔고, 강냉이죽을 많이 먹었다”는 그의 말은 쿠바 한인들이 생존에 매달려야 했던 지난 세월을 압축해 들려주는 듯하다.
박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애니깽 둥치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틈틈이 할아버지로부터 ‘언문’을 배웠다. 그가 말하는 ‘언문’이란 곧 한글을 가리킨다.
“할아버지는 바깥에서는 쿠바 말을 하더라도 집 안에서는 우리말만 하도록 했고, 어쩌다 쿠바 말을 하면 야단치셨다.”
그는 평소 우리말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텐데도 언어 구사력이 풍부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같은 떡을 놓고 고향이 서울인 할아버지는 밀떡이라고 하고, 평양이 고향인 어머니는 전병이라고 했어요.”
듣고 보니 그의 우리말 비결은 영한사전 덕이다. “카스트로 혁명 이전인 50년 전 미국에 갔다온 친척이 작은 영한사전을 하나 들고 왔기에, 거기 나오는 단어들을 열심히 외웠다”는 이야기다. 돋보기 너머로 총기 어린 눈매가 인상적이다. 그는 김치를 담그는 법을 할머니로부터 배웠다. “애니깽 농장에 드나드는 중국인들에게 고춧가루를 사 김치를 담가 먹었고, 미역냉국이나 다시마·김 같은 것도 중국에서 들여오는 것을 사 먹었다”고 말했다.
가루 사서 김치 담가 먹었다”
중학교를 나와 카스트로 혁명 뒤 국영 석유회사에서 타자수로 일했다는 루이사 박은 결혼하지 않고 홀몸으로 지내왔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 나라 풍습도 다르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 결혼을 단념했다. 쿠바 한인들이 겪어온 또 다른 어려움은 한국의 피가 섞인 마땅한 배우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결혼 적령기의 한인 젊은이들이 많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웬만하면 피하는 가까운 친척, 이를테면 4촌끼리 결혼하는 일도 벌어지고는 했다. 본관이 같거나 같은 성씨끼리의 결혼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같은 집안끼리 겹사돈을 맺는 일도 잦았다. 이를테면 딸을 시집보낸 집에서 사돈 되는 사람에게 “사돈 집안 아기씨를 우리 집 며느리로 보내 주오”라는 식이었다. 이즈음은 그나마 그런 대화가 오가지도 않는다. 겹사돈을 맺던 시절은 오래전에 이미 지나 버렸다.
1926년생으로 여섯 살 위인 고모 박영희는 쿠바인 남편을 두었다. 박영희의 키가 150cm쯤인 데 비해 그의 남편 안토니오 캄파(87)는 180cm의 큰 키다. 캄파는 100% 쿠바인. “한국인 아내와 오래 살아서일까,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들 사이에 난 딸 알리시아 캄파 박(39)은 화가다.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한국에서 딸의 개인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것이 엄마 박영희의 꿈이다. 가난한 그로서는 그저 막연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박쌍규가 신은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짝이 다른데다 색깔이 바라고 다 해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쿠바에서 한국음식을 사 먹는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대도시인 아바나에도 한국식당이 없는 곳이 쿠바다. 아바나에는 중국인들이 몰려 사는 차이나타운은 있지만, 코리아타운은 없다. 아바나에는 한국 대사관은 없어도 북한 대사관은 있다(북한은 카스트로 혁명 바로 뒤인 1960년 쿠바와 국교를 맺었고, 그 이듬해에 아바나에 대사관이 들어섰다).
1990년대 초 아바나에 ‘모란봉’이라는 간판을 단 북한식당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1년을 겨우 버티고는 적자를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았다. ‘세계화’된 중국음식과 달리, 한국음식은 쿠바인들 입맛에 맞지 않았다. 우리 한인 후예들은 대부분 가난했기에 그런 식당의 문턱은 너무 높았을 것이다.
쿠바에는 유대인이 약 1,500명쯤 살고 있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유럽 땅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아바나에만 3개의 크고 작은 시너고그(유대인 교회당)가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세운 것들이다. 민족적 전통문화 가치를 버리지 않기로 소문난 유대인들이지만, 아바나 시너고그에서 만난 유대인 젊은이들은 “히브리 말을 조금 읽기는 하지만 말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스페인어로 된 유대교 경전을 읽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쿠바의 한인사회는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쿠바혁명이라는 이름의 용광로 속에 녹아들었다. 한인사회는 이미 쿠바사회에 동화돼 버린 상태다.
마탄사스에서 만났던 마르타 임(헤르니모 임의 여동생, 전 마탄사스 종합대 철학과 교수)은 쿠바혁명이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쿠바혁명으로 교육과 의료부문에서 지난날과 같은 불평등이 사라진 다음부터 우리 한인 후예들도 교육과 취업의 평등한 기회를 더 많이 누리게 됐다. 바티스타 정권 시절에는 돈이 있어야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제는 본인이 공부를 따라갈 재능과 의욕만 있다면 대학교육도 어렵지 않다. 쿠바혁명으로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서면서 빈민층의 고용기회도 많아졌고, 우리 한인들에 대한 차별도 사라졌다. 한인들이 우리말과 문화를 잊고 쿠바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한 것은 쿠바혁명의 영향이 크다. 게다가 남북한으로 나뉜 한반도의 현실이 사회주의국가 쿠바의 한인들이 조국을 멀고 먼 나라로 여기게끔 만든 한 요인일 것이다”
2005년 05월호 | 입력날짜 2005. 04. 21
[광복 60주년 특별기획ㅣ인터뷰] 쿠바 혁명에 뛰어든 한인 후예 헤로니모 임
“혁명을 위해 도시 게릴라 길 걸었다”
쿠바 아바나=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1959)에는 일부 쿠바 한인들도 적극 참여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헤로니모 임(한국 이름은 임은조·79). 아바나 서쪽 교외, 그의 집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쿠바공산당 창건당원증, 지하투쟁 메달, 내무부 훈장은 쿠바혁명 과정에서 그가 맡았던 나름의 역할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헤로니모 임이 쿠바혁명에 참여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아바나국립대학 법대 학생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쿠바 한인이 가난한 탓에 학교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하던 시절, 헤로니모 임은 고학하면서 아바나 법대에 다녔다. 일에 쫓겨 강의를 듣지 못하고 시험을 치르는 일조차 생겨났다.
때로는 학교를 쉬고 마탄사스의 집으로 돌아가 노동으로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어려운 고학생활을 하면서 임씨는 당시 부익부 빈익빈, 외국 자본가들의 쿠바 자원 약탈 등 쿠바사회의 모순에 눈뜨면서 혁명적 생각을 품게 됐다.
그가 쿠바혁명에 본격적으로 몸을 던진 시점은 1956년. 피델 카스트로를 우두머리로 한 일단의 젊은이들이 쿠바 동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근거지 삼아 일으킨 7·26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였다(1953년 7월26일 청년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다른 36명의 청년과 함께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몬카다 병영을 점령하려다 실패로 끝났다. 그로부터 쿠바 혁명운동은 7·26운동이라고 일컬어졌다). 헤로니모 임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 법대에서 공부했지만, 개인적으로 가깝게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혁명투쟁 과정에서 임씨가 맡은 역할은 아바나에서의 지하투쟁. 정보와 투쟁 자금을 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둔 피델 카스트로 쪽에 건네는 도시 게릴라 임무였다. 그는 혁명 지지자들로부터 돈을 받으면 ‘보노(Bono)’라는 이름의 혁명공채(일종의 영수증)를 건네주었다. 그는 바티스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더 위험한 임무를 아바나의 동지들과 더불어 수행했다. 용케 바티스타 정부의 비밀경찰들 눈을 피해갔지만, 몇 차례 체포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59년 1월2일 쿠바혁명군이 아바나에 들어오자 임씨는 동지들과 함께 경찰서를 접수해 무기를 압수했다. 그리고 아바나 시 중심가인 비에하 지역에서 지난날 바티스타 정권 아래서 이뤄졌던 고문과 살해 피해자 유족들로부터 고발을 접수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1년 반쯤 그런 일을 하다 산업부 관리로 들어가 1989년 국장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일했다.
혁명 바로 뒤 체 게바라가 쿠바 산업부 장관으로 있을 때는 관리부서 일을 맡아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지난호 체 게바라 편에서 살펴보았듯, 출장길의 체 게바라 가방에 구멍 난 양말만 들어 있자 새 양말을 구해 넣은 일도 있다.
임씨는 퇴임 후 3년 동안(1992~95) 명예직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혁명 유공자인 그와 크리스티나 장 부부 사이에는 아들 넬손(42)과 딸 파트리시아(37)이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아들 넬슨은 오리엔테주 종합대학 교수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한인사회에서 임씨 집안은 예외로 꼽힌다.
월간 중앙/2005년 05월호 | 입력날짜 2005.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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