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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

4. 에네껜이 무엇이길래?

by 최재민 선교사 2021. 2. 7.

 

에네껜이 무엇이길래?

 

 

도대체 에네껜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용하며,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기에 멕시코의 반대편인 한국에까지 와서 사람들을 1,000여 명이나 불러가고, 데려온 사람들을 그리 혹사했을까? 

 

필자의 기억으로는 New YorkManhattan 빌딩들을 건축할 때 많은 중국 사람들이 혹사당한 것으로 안다. 철도 건설도 아니고, 중요한 교량 공사도 아니고, 금광 채굴도 아니고, 항구 건설도 아니고, 아름드리 원목을 자르는 일도 아닌 까짓(?) 선인장 자르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오고, 사람들을 혹사 시켰다면 그 에네껜이 상당히 중요했을 것이다

 

물론 도미니카에서 설탕을 가공하는 사탕수수 재배 그림에서 농부들을 모질게 다루는 그림들을 본 일이 있다. 그렇다면 에네껜도 적어도 사탕수수만큼 중요했을 텐데 그것을 무엇에 사용했을까? 이번에야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장의 사진을 실었고 이것도 많이 줄여서 실은 것이다(나의 원 글에...).

 

 

 

메리다 주변에 있는 오늘날의 에네껜 농장

 

 

에네껜은 주로 “Henequen”으로 쓰나 “Heniquen(에니껜)” 또는 “Jenequen(헤네껜)”으로도 쓰인다. 아마 그 이유는 유카탄 반도에 주로 살았던 마야 인디언들의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며, 당시 많은 농장주인 프랑스인들의 프랑스어도 가미되었을 것이다. 한국어로는 어저귀 또는 용설란이라고 하는데 보통 어른 키만큼씩 자라는 선인장의 한 종류로 그것이 유까딴(Yucatan) 반도에서 잘 자랐다

 

인디언(Indio)들은 에네껜에서 섬유들을 벗겨내어 끈들을 만들었고, 그 끈들을 튼튼한 줄로 만들어서 신전을 짓는데 필요한 돌들을 나르는데 사용하였다. 그 후 계속 로프를 만드는데 사용된 에네껜은 1850년대부터 유까딴 제일의 수출품목이 되었다. 물론 그 섬유는 주로 해상과 육상에서 큰 짐을 묶는 로프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맥코믹(McCormick) 농기구 회사에서 많은 농기구들이 개량 생산이 지속되어 나중에는 자동으로 물건을 묶는데 까지 발전되어 수확량이 많아지므로 부가적으로 더 많은 끈들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에네껭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외에 크고 작은 가방, 해먹(Hammocks), 샌들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니 해상과 육상에서, 선박, 공장, 농장과 가정의 모든 곳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어선의 그물을 만드는데도 엄청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동네 도서관의 책에서 찾은 사진인데 정말 귀한 사진이다.
왜냐하면 이 사진에는 에네껜에서 추출한 섬유를 건조하는 장면과 완제품인 로프와
섬유를 나귀(말)에 싣고 운반하는 장면이 종합적으로 나타나 있으니까... 

 

 

지속적으로 세계 각국에서 수요가 늘어나 전세계 수요 50만 톤의 80%40만 톤을 메리다의 농장들이 공급하였다. 노동력이 모자랐던 당시로서는 교도소의 재소자들까지 동원해야할 정도로 번창했고, 에네껜 농사는 메리다의 최대 산업이었다. 인력이 이렇게 모자라 한국의 노동자들까지 모집했던 것이 1905년 당시의 형편이었으며, 그 당시 에네껜 농장 주인들은 큰돈을 벌고 호화의 극치를 누렸다. 그래서 당시에 사탕수수는 백금(White Gold), 에네껜은 녹금(Green Gold)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에네껜 섬유의 수요가 더 많이 늘어났다

 

그 후 Cuba, Haiti, Panama 등지에서도 계속 생산되었고 나중에는 필리핀에서 생산되는 마닐라 삼과 인도와 동아프리카에서도 생산되어 1925년경에는 이미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1940년대에는 나일론 로프 등 대용품들이 대량생산됨에 따라 수십 년간의 영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4년 동안의 계약기간이 끝나 이들은 귀국을 원했으나 돌아갈 여비도 마련되지 않았다. 농장주들은 부귀를 누렸지만 농장 일꾼들은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매우 낮은 임금에 생활용품도 그들로부터 구입해야 했는데 그 값은 비쌌던 것이다. 모국은 오래전부터 세계열강들의 야욕 앞에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고 을사조약이 체결(1905. 11. 17.)되기 전부터 외교, 재정, 군사권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는데 4년 동안의 계약기간이 끝난 1909년은 이미조국의 실권은 일본의 수중에 거의 넘어가 있어서 한국 정부에서도 크게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대부분 다시 에네껜 농장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다

 

이들의 비참한 소식이 하와이와 미주(주로 샌프란시스코)쪽에 알려지며 1917년부터 1918년 사이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멕시코 한인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하와이나 미 본토로 이주시키려는 계획들도 있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 후 이들 가운데 300여명은 쿠바로 가서(1921) 좀 더 나은 생활을 원했으나 다시 에네껜 농장이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다시 고된 일들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 한인 후예들은 지금까지도 유까딴에서 생활하는 후손들이 있지만 멕시코시를 비롯하여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1983년 한국일보의 티화나 취재 기사에 의하면 티화나 거주 한인계 멕시코인은 90세대에 9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러해 전 그곳에 다녀오신 분의 글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아직도 메리다 주변의 에네껜 농장 주변에서 떠나지 못하고 준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후예들은 약 500명 정도. 이들도 외모만으론 한인을 닮은 부분을 찾기가 힘드나 이들의 성씨가 한국 성씨를 보존하고 있고, 그들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한국인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파하(Paja)’라고 하는 2-3평정도 되는 초가지붕 아래 땅바닥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맨발에 샤워시설은커녕 화장실도 없이 방뇨하며 칠면조, , 개와 돼지 등에서 나오는 악취가 풍기는 생활환경 속에서 모기와 파리가 우글거리는 극한 빈곤 속에서 앞날의 어떤 소망도 없이 그냥 되는대로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3년 전 한인교회 단기 선교팀이 이들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많은 동네 주민들이 맨발에 상의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에는 이가 굼실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인교회들의 꾸준한 지원으로 이제 뒷마당에는 빨래가 걸렸고, 주민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는 등 생활개선이 뚜렷했다.” 

 

물론 지금도 유까딴에는 에네껜 농장이 있고 공장도 가동되고 있다. 지금은 주로 해먹(Hammock, 그물침대), 침대 쿠션, 의자 쿠션, 카펫 등에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