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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쿠바 이민사

3. 유까딴에서의 이민 선조들의 지독한 고생

by 최재민 선교사 2021. 2. 7.

 

 

유까딴에서의 이민 선조들의 지독한 고생

 

당시 멕시코 이민선을 탄 이민자들은 유까딴(Yucatan)을 하와이와 같은 수준의 지상낙원으로 알았으나 유까딴의 에네껜(henequen) 농장은 노예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실제 이들 중 일부는 하와이와 멕시코 중 멕시코가 더 나은 지역으로 판단해 유까딴을 선택했다고 한다. 아마 일부의 이민자들은 한때 캘리포니아 쪽에 불었던 Gold rush의 꿈도 조금은 꾸었을 것이다. Yucatan의 Merida로 이송되었던 이들 중 일부는 시멘트 광산이나 그 개간 사업지로 갔고, 대부분은 적은 무리로 나뉘어져 24개의 에네껜 농장으로 갔다. 

 

 

 

 

 
에네껜을 자르는 이 사진은 가끔 볼 수 있다.
<쿠바 이민사>의 본문에도 이 사진이 나오는데
1950년으로 되어 있다. 아마 1950년대겠지...

 

물론 하와이 농장에서도 상당한 고생을 했던 분들의 글을 한국에서 읽었던 적이 있다. 그들도 채찍으로 맞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 100년: 1876- >의 한 사진 설명에 "하와이 이주 한국 노동자 명부와 그들을 괴롭힌 가죽 채찍- 하와이로 건너간 초기 한국 이민들은 그 곳 백인 사탕수수 밭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이런 채찍에 시달렸다."고 써있다. 그러나 멕시코와 하와이 농장을 비교한 글들마다 하와이는 지상낙원으로 표현했고, 멕시코는 생지옥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거환경, 생활환경, 교육환경 등이 아무래도 하와이 쪽은 많이 나았을 것이다. 고생을 해도 보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네껜 농장 쪽은 고생도 더 심했고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이자경 선생의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에 유까딴 이민 후손들의 많은 인터뷰가 나오는데 감독들의 무서운 채찍질, 에네껜 가시, 뜨거운 날씨, 빈약한 식사, 학령기의 아이들을 공부시키지 못하는 안타까움 등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았다는 것이다. 

 

이 당시는 멕시코의 3대 인물 중의 한사람인 Porfirio Diaz(1830-1915)가 집권하고 있었다. 디아스는 정치 무상, 내란의 연속으로 안정성이라고는 별로 없는 멕시코에서 놀랍게도 1876년부터 1911년까지 도중에 5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장장 34년간 장기독재를 행사하였다. 그는 독재자였지만 멕시코의 공업화를 위하여 철도를 많이 건설했다. 국가 재정도 독립 후 처음으로 흑자가 되었고, 멕시코 시티(Mexico City)가 파리처럼 아름다워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의 근대화, 공업화 정책은 모두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이룬 것이었다. 따라서 공업자본은 모두 외국인들의 손에 있었고, 멕시코 전토의 1/7이 역시 외국인의 소유로 되었을 정도였다. 디아스의 독재도 결국 많은 사람들의 저항에 의해(1910년 멕시코 혁명 발생, 1918년까지 이어짐) 결국 실각하고 1911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어느 나라에나 처음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예상외의 고난과 고생들이 따르는 것처럼 한인들의 멕시코 초기이민도 너무 많은 고생 즉 노예와 같이 혹사되고 우마와 같이 취급되었다. 에네껜 농장으로 보내진 노동자들은 에네껜을 자를 때 가시에 찔리는 일도 많았고, 그 잎들을 잘라 섬유를 벗겨내는 일과 Merida 지방의 기후가 여름의 경우 섭씨 30도(화씨 86도)가 훨씬 넘는 밀림지대라 그 고생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멕시코인 감독들의 수하에 놓여 졌는데 그들은 채찍을 들고 소나 돼지들을 몰듯 소리를 지르며 다녔고, 저희의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인정사정없이 매질을 했으므로 손에는 에네껜 가시에 찔린 상처와 등에는 채찍으로 맞은 상처로 온 몸이 달아올라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고생스러웠다. 하루 12시간의 고역이 끝난 후 토굴같은 숙소에 돌아오면 우선 무엇보다도 그날 낮에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Merida시에 거주하는 허훼이(河惠)라는 중국인이 한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편지로 중국의 친구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이 중국신문에 소개되었고, 그 것을 한국의 황성신문이 1905년 7월 29일자 사설에 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인의 노예 등급이 5에서 6등급이고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차마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당시 그곳의 돼지 한 마리 값이 80전이었는데 한국 노동자 한사람의 몸값은 불과 30전 정도였다고 한다. 2일 후에는 같은 신문에 정부의 무책임한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멕시코 동포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이때는 을사조약이 체결(1905. 11. 17.)되기 전이었으나 이미 외교, 재정, 군사권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것과 다름이 없어서 한국 정부에서 크게 힘을 쓸 수 없었다. 

 

 

 

* 허훼이(河惠)라는 중국인이 쓴 편지의 진실성에 대한 이의도 있다. 

왜냐하면 이민 선조들이 메리다에 도착한 때가 5월 중순인데 

중국 신문에 실린 때는 같은 해 6월 쯤이다. 

그리고 7월 29일자 황성신문에 실렸으니... 

그렇다고 저 내용을 100% 무시한다는 것 또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견해는 어느정도 많은 부분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초기에는 저런 고생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당시쯤 탄광에서 일하는 사진을 보았는데 정말 열악한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도 Baja California의 San Quintin 여러 농장들의 

인디오들의 주거지를 가보면 너무너무 형편이 없는데 

지금부터 100년 전에야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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