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에서 이어...
8괘와 3효(爻)
"4개의 귀퉁이에는 3효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원래는 8개의 3효가 놓여 있던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말로는 팔괘라고 합니다. 즉 우리 국기에는 8개의 3효가 배열되어 있어야 했으나 北西, 南東, 北東, 南西에 해당하는 4개의 방위는 빠진 채 단지 기본방위인 동서남북만을 상징하는 4개의 3효만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8개의 3효, 즉 둘레의 표시에 대해 재차 언급하자면 그것은 중앙에 있는 두 개의 주요원리의 3중 조합으로서 4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렇게 4개로 세분된 도형으로 4대 요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두 중심원리 중의 하나의 세력의 크기에 의해 또는 그들이 서로 덧붙여져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언급되는 사항이 숙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직선으로 그려진 두 개의 선(線)〔역주: 양(陽)은 외줄로 된 線(-)으로 표시되고, 음(陰)은 갈라진 線(- -)으로 표시됨〕은 중앙의 음양 원리를 나타내는 표상으로서 그것이 이중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위에 언급한 그대로입니다."
"두 번째로, 4개의 3효는 음양원리의 이원성에 따라 주요한 4원소로 표현되는데 그것들은 불 (火), 물(水), 공기(空氣), 땅(地)입니다."
"세 번째로, 8개의 3효는 만물의 근원에서 8개로 발현해서 생성되는 창조적인 힘으로서 그것은 그 극성(極性)과 배열방식에 따라 각각의 요소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은 모든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는 활력을 낳게 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태우고, 파괴하는 열을 만들어 냅니다. 공기는 대기 중에서 승화되어 바람으로 바뀌고 물은 수증기로 증발돼 대기 중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액화되어 비를 만들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가는 계절의 순화에 따라 얼었다가 녹는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땅은 가연성 있는 여러 동종의 금속물질 뿐만 아니라 단단한 돌과 같은 여러 이질적인 물질 모두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한 장황한 설명은 제가 나름대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철학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으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들 국기에 대해 여러분들이 그 의미를 확실히 아셨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국기의 문양이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강토에 대한 주권을 만방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우리 국가의 고유한 상징으로 채택했습니다. 우리들은 국기에 새겨진 창조적인 철학과 함께 이 유일한 국기를 소중하게 아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우리들 국기에 대해 그 의미를 확실히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말을 끝냈다.
모두가 기립해 선생님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어 한인회 회장이 일어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금 전 존경하는 안 선생님께서 우리 국기가 가지고 있는 뜻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일단 선생님의 강연은 끝내겠습니다. 오후에 다시 모임이 있을 것입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모였다. 무슨 목적으로 다시 모이게 됐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부인회를 구성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당시 한인회 회장은 유진태 선생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소약체(Xo-Yax-Che)농장에서 레빰(Le Pam)농장으로 이주해 갔었다. 몇 달 뒤 유 선생 부부는 남보다 먼저 메리다시로 갔다. 뒤에 안 일이지만 유 선생의 부인되시는 김심경 여사께서 부인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날 밤 저녁 모임에서 안 선생님을 비롯한 한인회 간부진이 원탁 의자에 마주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부인회 설립건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인 부인회
안 선생님이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돌아갈 무렵에, 한인 부인회는 매달 열리는 모임에 50명이 넘는 부인들이 모일 정도로 크게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부인네들은 한 달에 이틀, 즉 일요일과 월요일 양일 남편과 어린아이들을 집에 남겨둔 채(즉 가사를 제쳐두고)부인회 일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이렇게 계속해서, 부인회는 2년 동안 잘 운영돼 나갔다.
초창기 부인회 임원들의 임기는 남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년이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때는 부인회가 눈에 띄게 발전하는 듯 보였지만 그 이듬해, 간부들이 바뀌면서부터 눈에 보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아마도 이런 타당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사회 정치적 의식의 결여도 있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 한인들이 쿠바로 이민을 감에 따라 부인네들이 많이 빠지게 된 것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 부인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고 내건 모토가 어떤 것인지 사실인즉 알지 못한다. 단지 순수한 친목 정도의 모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연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한국인은 동족간에 우애가 아주 두터운 사람들이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창호 선생님 송별
3.1운동 1주년 기념식 직후, 안 선생님은 한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추진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신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로스앤젤레스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안 선생께서는 그곳의 한인 거주지들을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인회 회장은 이 소식을 모든 농장에 알렸고 동시에 송별 모임을 소집했다.
3.1운동 기념식은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안 선생님이 떠나신다는 사실로 인해 이번 모임에도 회장은 한인사회를 총대표하여 그리고 회장의 이름으로 선생님께 그동안 변변치 못한 대접을 드린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을 드렸고 조국의 안녕을 위해 걱정하시는 안 선생님의 장도에 성공이 있기를 기원했다.
송별식이 끝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 농장으로 되돌아갔고 몇몇 사람들만이 안 선생님을 쁘로그레소(Progreso) 항구까지 배웅 나가기 위해 남았다.
마침내 항구로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 선생님과 함께 그리로 갔다. 항만 당국은 그들에게 배 안까지 들어가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배의 이름은 라 에스뻬란사(La Esperanza. 역주: '희망'이란 뜻임)였다. 배 안의 통로에는 각각 이름들이 붙어 있었고, 또 방마다 문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실이었다. 이 선실 중의 하나로 안창호 선생이 들어가셨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들은 새벽 2시에서 3시에 일어나서 저녁 5시나 6시까지 농장에서 일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 6시에서 9시까지 한국어 공부를 했고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이렇게 생활하면서 달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한인들이 이민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쿠바 이민
이 이민 소식은 내 귀로 직접 들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들, 특히 메리다시를 자주 들락거려 그 경위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계약업자가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은 이 사람 저 사람 귀에 들어가 괜스레 소문이 되어 말썽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거라고 우리들은 나중에 추측했다.
쿠바 이민을 주선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한사람인지 여러 사람인지 나는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350명이나 되는 이민자들이 한데 모였고 모두가 이등칸 기차를 타고 메리다를 떠나 쿠바로 향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이 있다. 그들이 타고 갔던 '유까딴 연합철도'의 이등칸 객차는 산뜻했고 청소를 해 그런지 깨끗했었다. 비록 좌석에 쿠션은 없었지만 거기에는 하얀 천이 둘러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기차의 장점은 언제나 제 시간에 맞춰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특별열차는 한인으로서 멕시코 철도회사에 고용되어 기관사로 일하고 있던 분이 운전을 했다.
이 여행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됐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열차 시간표를 보면 메리다에서 깜뻬체(Campeche)까지 12시간 걸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인들이 목적지인 깜뻬체에 도착하자, 배가 이미 도착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안티야스 제도(Antillas)로 향하는 그 배에 바로 올라탔다.
그들은 앞으로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가족, 친구, 친지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나 친척들은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4년간의 강제노동 기간 동안 겪은 고통을 떠올리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와서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두 번씩이나 모험을 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배는 아바나(Habana)항구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이민국 관리들과 검역국 담당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이민국 관리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서류를 보더니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같이 따라온 몇몇 대표들이 앞으로 나와 대답을 하자 그들만 상륙 허가를 받았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배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이민국 고위당국과도 문제해결이 불가능해지자 그들은 천상 메리다에 있는 한인회로 긴급도움을 요청하는 전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받아본 메리다 한인회는 즉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대한인국민회로 똑같은 내용의 전신을 급히 보냈다. 당시 정부와 정부 사이에 이미 어떤 협약이 있었는지(역주: 그 당시 한국은 일제 치하에 있었으므로 한국정부와 협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쿠바 정부와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대한인국민회 간에 서로 이 건을 돕고 연락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듦) 아니면 쿠바 정부가 자체결정을 해 특별 배려를 해주었는지 어쨌든 15일 후에 나머지 사람들도 쿠바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번 사건은 쿠바에 도착한 한인들이 자기들은 일본에 예속된 국민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쿠바 정부는 이 미지의 사람들, 다시 말해 존재도 하지 않는 유령국가의 국민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한인들이 고유한 뿌리를 가진 한 나라의 국민으로 그들만의 살아있는 이미지를 간직했다 하더라고 국제법상으로 그들은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쿠바 정부는 계약알선업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인지시키고는 조용히 지낼 것을 요구했고 또 그들에게 이 사실을 다른 한국인들에게 공지하도록 했다.
이제 육지에 막 상륙한 한인들에게 이전 메리다에 도착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한인들은 그들을 농장으로 데리고 갈 농장주들을 기다렸는데,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곳에는 그들을 데리고 갈 기차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단지 강을 거슬러 운항하는 조그만 여객선을 타고 에네껜 통장이 있는 조그만 섬들이나 제당 공장들로 갔다.
여기까지가 쿠바로 이민간 한인들에 대해 내가 들었던 이야기의 전부다.
따바스꼬(Tabasco) 주(州) 후론떼라(Frontera) 시에서
나는 내 운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그리고 직업을 바꿔볼 생각에서 레빰 농장을 나와 따바스코주 후론떼라 항구로 갔다. 내가 그리로 간 것은 아버지가 거기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일단의 한국 사람들이 소작계약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그 도시에서도 대한인국민회의 이름하에 임대한 한인회관이 있었다. 멕시코에 설립된 어떤 한인회도 멕시코 주정부에 공식으로 등록되지는 못했다. 오로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본부가 있던 대한인국민회의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그곳의 한인회 회장은 공인덕씨라는 분이었다. 나의 부친께서는 그곳에서도 3∼4명의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각한 것만큼 되지 않아 나는 거기에서도 오래 있질 못하고 다시 유까딴으로 돌아갔다.
한인회 자기 집 마련
나는 완전히 거지꼴이 다 되어 따바스꼬로부터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도망자처럼 다시 레빰 농장으로 숨어 들어갔다. 나의 매형이었던 유 선생은 농장 안에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었고, 계약알선업자로 일했고 그는 농장에서 제2의 실력자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진짜로 실권을 쥔 사람은 뻬온(Peon)씨 부부였다.
나는 매형 내외에게서 뭔가 서두른다는 기색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듣기 전 까지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야기인즉슨 그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집을 살 수가 없고 게다가 한인회 이름으로 집을 구입한다 해도 한인회가 정식으로 등록된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만약 그런 공적인 단체가 존재했다하더라고 멕시코 정부는 한인회 법인(法人) 이름으로 건물을 구입하는 것 자체를 허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일한 해결책은 일단의 사람들이 멕시코 국적으로 바꾼 다음, 그들의 이름을 빌려 건물을 구입, 수속절차를 하는 것이었다.
매형인 뻬드로 유의 부친께서 부지런히 뛰어다닌 결과, 1930년에서 1931년 사이, 대여섯 명의 한인들이 국적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한인회 사람들은 그들의 위임장을 들고 한인회 건물을 물색하고 다녔다. 이에 앞서 당시 한인회 회장이었던 유진태씨는 한인회관 구입에 필요한 자금이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농장에 있는 동포들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여러 사람의 명의로 그 소원을 이룩했다. 회관 건물 구입 시 이름을 빌려준 공동소유자 한 두 분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
나하고는 뗄 레야 땔 수 없는 이 메리다시에는 지금도2세 이하의 세대를 포함해서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동족끼리도 서로 어울리려 하지 않고, 한인회나 그 어떤 모임에도 관심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한인회가 아닌 보다 잘되어 있는 기타 다른 모임이나 회합에는 나갈지 모르지만 한인들의 모임에는 참석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판단해 볼 때 한인들 사이에서 서로 만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어서 그랬던가 싶다.
아무튼 사실을 말하자면, 메리다 한인회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는데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런 상태가 15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메리다에 살고있는 누군가가 아직까지 한인회 건물에 부과되는 세금이나 기타 공과금을 물고 있다.
돌이킬 수 없었던 실수
나는 농장에서 있는 동안 스페인식 내 이름(수식어와 명사로 된)을 사용할 필요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끼리끼리 어울려 살아 한국말만 써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어로 대화할 말상대도 없었다. 그나마 나만이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몇 마디 단어를 가지고 스페인 말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후론떼라 항구에 농부로 일하러 갔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나는 식료품 구입차 일주일에 한번은 농장에서 도시로 나갔는데, 이렇게 왔다갔다하는 동안 한 번은 식료품 가게 주인인 스페인사람 하나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당신 이름이 뭐요?"
"호세 산체스(Jose Sanchez)요"
"산체스라... 이름 한번 써보쇼"
그러나 창피하게도 나는 내 이름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을 당하고 난 나는 그 다음 주 일요일부터는 다른 가게로 옮겼다. 이 항구에서도 나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나는 다시 따바스꼬 주의 비야에르모사(Villa Hermosa)에 갔고, 거기서 스페인 사람이 역시 주인이었던 한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당신 이름이 뭔고?"
"호세 산체스라고 합니다"
식당 주인은 뭔가 생각하는 척 하다가는 이윽고 다시 물어보길,
"당신 필리핀 사람 아뇨?"
"멕시코에서 태어난 한국인입니다."
"멕시코시에서 났소?"
"아닙니다. 메리다에서 태어났습니다."
"음! 그렇다면 당신 부모는 필리핀 사람들 같은데, 아닌가?"
"제 부모님은 한국 사람입니다. 필리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식당의 영업 규모는 중간 정도였다.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바야흐로 노동쟁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얼굴을 한 나 같은 사람은 그들 조합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그것은 자국민에만 우선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외국인한테는 별개의 문제라는 거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위의 이야기 주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 또한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고유한 이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을 갖게 된다. 동시에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이름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새로운 이름을 갖고자 하는데 나는 이것을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개인적 삶에 간섭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모름지기 각자의 삶이라는 것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밖에 나가 사회활동을 하게 될 때 그의 인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즉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모임이거나 사회적인 클럽 같은 곳에서 그의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처신할 때 그의 인격에 어울리는 가치가 나오게 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져 그때야 비로소 명성을 얻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본인이 원하거나 또는 어떤 알려진 또는 미지의 상황으로 부득이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될 경우가 있다. 즉, 불안정한 나라들에서 종종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예를 들자면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내전이 일어나 생명이 위험할 때 또는 법망을 피해 도피할 필요가 있을 때 또는 그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는 비속한 단어로 작명되어 본인이 수치심을 느낄 경우에도 개명을 하게 된다. 이런 개명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가 예전에 지녔던 실체는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지기들로부터 비웃음, 조소, 불신을 당하게 되며 더 나아가 새롭게 얻은 자아에 안정되지 못하고 동요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더군다나 한 이름을 타국의 언어로 바꾸는 경우 본인의 이름이라 할 지라도 그 개성적 요소는 다 사라져 버린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바뀐 언어로 발음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는 본인의 고유한 이름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고려하며 스페인 이름의 발음에 가장 가깝게 그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경우이다.
이름 의미 스페인어로 뜻이 맞는 또는 받아들여진 이름
EK (엑) 별(星) 에스뜨레야(Estrella)
PECH (백) 진드기 뻬드라사(Pedraza)
UK (욱) 이 우깡가(Ukanga)
JA (하) 물(水) 아구아도(Aguado 물을 탄)
KAP (갑) 석회(石灰) 깔데론(Calderon)
PEK (백) 개(犬) 뻬드레로(Pedrero, 석공)
이 예들에서 보듯이 많은 원주민들이 스페인 식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마야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었을 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또 자기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스페인 식으로 이름을 바꾼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들어봐도 이런 이름들은 마야 본래의 토착 이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단지 농장주나 그들의 주인들, 아니면 유까딴의 지체 높은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은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원주민들은 마치 버러지나 짐승처럼 간주, 이런 식으로 마구 고쳐진 이름을 붙여줬던 것이다. 20세기 이 개명된 세계에, 라틴 아메리카에는 아직도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을 이렇게 취급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는 것이다.
한인들의 이름
기억하기조차 힘든 아주 먼 옛날부터 외국의 잦은 침략으로 한국 이름에는 많은 혼란이 생겼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침략자들로부터 살아 남기 위해 이름들을 많이 갈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기에 앞서, 상놈들의 이름은 주인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정해졌다. 노비라는 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은 평생 이 양반에서 저 양반으로 팔려 다녔기 때문에 그들에게 족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 노비들은 양반들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물건으로 바뀌어 더러운 버러지처럼 취급되지는 않았다. 반대로, 이들은 병에 걸렸을 때는 기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이뻐서 그랬다기 보다는 병에서 회복된 뒤 주인을 더욱더 섬기도록 하고자 하는 계산에서였다.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한 걸로 봐서 사실인 것 같다. 이런 하층계급의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금세기 첫 10년까지 즉, 인류애에 입각한 정치변혁이 과도기를 겪고,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때까지 계속 존재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까딴에 있던 몇몇 한국인들은 기꺼이 이름을 바꿨다. 그들은 이름뿐만 아니라 성까지도 한국 이름과는 전혀 딴판인 이름으로 개명을 했고 이중 이름으로 불려졌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 이름으로, 현지 멕시코인들 사이에서는 스페인 이름으로 불려졌다. 이런 사태는 우리 얼마 남지 않은 2세들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여기 멕시코에서는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기때문에 호적등록을 해도 다음 세대의 자식들은 한국이름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제는 점점 한인 동족끼리의 결혼도 뜸하고 또 그들끼리 결혼신고도 없는 것을 보아 한국 이름은 조속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
지금 한가지 자문해 보는데,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해서 우리 부모님들께서 스페인 이름을 받아들이셨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젠가 한 번 아버지께 이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으나 그때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마도 강제노동 계약 기간 동안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된게 아닌가 추측해 볼뿐이다. 그 당시 농장의 대리인들은 자기들 부르기 쉽게 제멋대로 한인들에게 편리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나 같은 사람이나 다른 후손들에 끼칠 심각한 해악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이대로 이름이 굳어져 뒤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우리들의 혈관 속에는 분명 한국 피가 흐르지만 우리들은 어디 멕시코나 서구부모를 둔 자식처럼 되어버렸다. 반복해 말하자면 이런 피해는 이제 사라져가는 우리 2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호칭
내 생각에 이름은 각 개인이 살고있는 주위환경, 즉 장소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계곡(Valle) 근처에 살았다면 델 바예(Sr. Del Valle. 역주: '계곡에서', 또는 '계곡'의 뜻)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고 강가(Rio)에서 살았다면 델 리오(Del Rio. 역주: '강에서' 또는 '강에서 나온'이라는 뜻)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런 식의 호칭은 비단 스페인 이름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한국 이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이름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되며, 수천 년을 통해 조금씩 지금의 이름으로 다듬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양반과 같은 지배계층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구시대의 케케묵은 전통이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데 그러나 이 전통은 세대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용한 것이다.
내란이나 이민족의 침략으로 불안정했던 나라들에서는, 그것으로 인해 가계가 끊어지지만, 국가가 재건되면 다시 새로운 가계가 형성된다. 한국에서는 외국 침략으로 시달리기 전에는 가계(家系)가 단절될 경험이 없다. 그러나 외국의 침략으로 인해 민족의 혈통은커녕 나라의 존망까지도 위태로워졌다.
한국의 이름은 한자 셋을 차용한 단어들, 즉 서로 떨어진 글자로 만들어졌는데 한자에 내포된 그 다양한 의미 때문에 이름만 보고 친족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즉, 성(性) 하나하고 이름 하나 즉 이 두 가지 이름이 합쳐져야만 고유한 한국의 이름이 된다. 다시 말해, 주어인 성과 형용사격인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 수식어 격인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고, 주어인 성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다시 말해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崔)라는 성은 '높은' 또는 '산꼭대기'를 의미하고, 이름인 인(仁)은, '어질다'는 뜻이고, 출(出)은 '태어나다' 또는 '나가다'라는 뜻인데, 이것을 전부 합치면 "높은 곳에서 한 어진 아이가 태어났다."라는 이름의 뜻이 생기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 특히 동양의 나라들에서 성(주어)은 맨 앞에 나오고 이름(형용사)은 뒤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이름에서 '최'는 성이고, '인'은 같은 항렬에 들어맞는 돌림자나 단어라 할 수 있고, '출'은 앞의 두 글자와 연결되어 한 문장으로 맞춰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생각해서 짓는 마지막 글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 형제들이 많을 때는, '인'자를 맏형의 이름처럼 돌림자로 가운데에 놓고 마지막 글자들로 문장이나 뜻을 정하는 것이다. 예로서 "높은 곳의 크고 어진 아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역주: 최인대(崔仁大)라는 이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자의 남동생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해본 예인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지막 함자는 마음대로 지을 수 있지만 같은 항렬의 계보를 나타내는 말이나 글자인 중간의 돌림자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대대손손으로 가문에서 적절하게 정한 여러 다른 돌림자를 쓰게 되며, 따라서 각각의 이름들은 여러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돌림자가 놓여지는 위치는 중간이나 끝의 구별이 없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성은 가문의 근본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언제나 앞에 놓인다.
이름의 이중기재
성(性) 한국어 의미 바뀐 스페인어 성
崔〔(최), Che〕 높은 또는 산꼭대기 산체스(Sanchez)
徐〔(서), Soo〕 천천히 또는 조용한 소우르(Sour), 소사(Sosa), 사우시(Sausi)
高〔(고), Koo〕 높히다 또는 언덕 꼬로나(Corona)
李〔(리), 이(옛 발음 리); Rhi, Hi, Lee〕
종(種) 디아스(Diaz), 이시(Hisi) 그리고 기타
金〔(김), Kim〕 금(金), 금속, 쇠 낌(Quim), 낑(King)
姜〔(강), Kang〕 강(江) (역주: 강태공의 강이래서 저자는 강(姜)을 아마도 한국어 동음 강(江)으로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깡가(Kanga)
우리들 이름뿐만 아니라 성까지 완전히 바꾼 우리들이 한인들 사이에서는 한국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스페인 이름으로 행세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모두 다 이름을 이중 등록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바로 내가 한국에서 당한 경우처럼 말이다. 두말할 것 없이 내 여권 속의 국적은 멕시코로 되어 있었고, 당연히 내 이름도 스페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한국 외무부의 한 직원이 리스트에 기재된 내 스페인 이름을 보고 멕시코인 생김새를 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또 다른 직원 역시 리스트에 적힌 한국 이름을 보고 동양인 모습의 역시 나를 찾고 있었다. 이 두 번째 직원이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곧 이 두 가지 이름이 나라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했다. 한국에서 나는 줄곧 한국 이름으로 계속 불렸지만 사실 내 정식 호칭은 아니었다. 지금 고백하지만, 그 당시는 내 한국 이름하고 국적하고 무슨 관계가 있으랴 싶어 아무 특별한 이유 없이 두 가지 이름으로 기재했는데 그때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름의 유래가 어떻게 됐든 간에 각자가 지닌 고유한 이름은 그 자체로 존중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 불려져서도 안되며, 또 이름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흠 잡힐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름은 발음되는 데로 불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어는 스페인어처럼 교양 있고 악센트가 있으며, 고음을 가지고 있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스페인어식으로 한국 이름을 발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한국 이름 역시 이 지구상에 있는 여느 이름들처럼 대단히 고귀한 것이다.
우리들 아버지 세대가 받아들인 몇몇 스페인 성(性)들, 그리고 우리들이 따로 사용하는 본래의 성을 열거해 보고 그 의미에 대해서 적어보겠다.
출생신고에 따른 국적
지금부터 약1세기 전, 리센시아도 멜초르 오깜뽀(Lic. Melchor Ocampo)는 호적등록 제도를 만들어 출생에 의한 멕시코 시민권을 명확하게 하는 한편(역주: 속지주의), 남녀결혼에 한 법적 절차를 제정했다.
이 당시, 멕시코에서 이 법을 실시한 주(州)는 극소수였다. 이와는 달리 교회, 특히 카톨릭 교회는 정복시기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종단 유지와 교회재산 보호, 그리고 인구분포를 확실하게 할 목적에 모든 신자들에게 출생신고를 의무화시켰다. 확실히 말하지만 이 시기에는 모든 것을 카톨릭 교단에 종속시킨 뒤,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렇게 제멋대로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멕시코인들 중 호적이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관공서에서 서류 수속을 할 때 많은 곤란을 겪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된 뒤에도 원호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관공서에서는 얼굴 생김새로 미루어 완전히 멕시코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해도 믿지를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마지막 방법으로 교회의 증빙서류를 띄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외국인의 용모를 가진 사람들은 서류에 날짜가 실제와 달리 잘못 기재된 경우 더 많은 곤란을 겪었다. 때때로 아이는 자동적으로 그 나라 국적을 얻게 되는데, 몇 년 뒤그들의 부모가 멕시코에 돌아와 어김없이 호적등록을 새로이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된 다음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데, 특히 우리같이 동양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것과 유사는 하지만 조금 과장된 예를 들자면, 외국 국적의 기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이에게는 태어난 시각, 기차가 있었던 지점에 속해있는 나라의 국적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갓난아이가 여행 목적지(역주: 부모가 태어난 나라)에 도착하게 되어 그곳에 산다면 그가 출생장소에서 획득한 국적하고는 모순이 일어난다. 즉 부모들의 국적이 있는 나라에서 살기 때문에 당연히 부모의 국적을 따라야 하지만, 실제로는 외국 시민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어떤 경우가 됐건 그의 부모의 원래 국적하고는 상이한 외국인으로서 간주되어 후에 많은 고생을 겪게 된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부모의 무지로 출생신고를 제때에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한편, 조국을 잃은 우리 부모세대들은 일장기 밑에서 식민지 백성이나 노예로 예속되어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다른 나라 국기 밑에서 예속돼 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우리들 역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헌법 제30조 개정
한인들이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을 당시 그곳에는 대민 업무를 취급하는 관청이 없었다. 더군다나 농장 측에서는 그들이 농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 시켰다. 아이들이 출생해도 한인들은 호적신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한인들은 이런 제도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에서는 이런 공적인 출생신고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한인들은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리라는 확고한 일념에서 공적인 서류를 소지하지 않았어도 걱정을 하지 않았고, 또 농장 근처에 있는 관청에도 그것들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 세대인 2세부터는 국적취득과 신분증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그것에 대한 필요한 서류 수속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 뒤, 2세 한인들은 그들의 자식들(3세)에 대한 호적신고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생존해 계신 1세 이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분들은 지난날 4년 동안의 강제계약 노동으로 고통은 겪었지만, 아무런 합법적인 서류 없이도 이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멕시코 정부의 우대와 관대함에 감사하고 있었다.
개정
개정 전의 멕시코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멕시코 생으로서 외국인을 부모로 둔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외국인으로 간주함." 그 뒤 1934∼1940년 사이에 개정된 헌법 조항에는 "외국인을 부모로 둔 자녀라도 멕시코에서 태어나면 속지주의에 의해 멕시코인 임"이라고 되어있다.
이 개정된 법으로 자녀를 둔 외국인 부모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한편 멕시코 정부는 그때부터 자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서류들을 정리해 구비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농장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그때까지도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런 통보가 없었다. 뒤에 1941∼1946년 전쟁 상태 선포 기간동안(역주: 멕시코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전쟁 포고를 했었다.)재 외국인에 대한 서류심사가 새롭게 일제히 실시되었다. 한인 1세분들(이젠 얼마 남지 않은)과 2세 한인들 모두는 서류를 구비하고 심사를 기다렸지만 당국에서는 법정 시효 기간이 지났으므로 불가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한인들은 증인을 대동하고 법규정에 따라 벌금을 물면서까지, 그리고 과거의 경위 -동시에, 당시 유까딴 반도의 농장주들이 그들의 종이나 노예들에게 가했던 횡포가 판을 치던 시기, 당국의 무성의에 대해 항의하면서- 를 설명하고 갖가지 합당한 이유를 들어 따졌다. 한국 이름을 스페인어 발음으로 일치시키는 것은 어려운데 차라리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성 최(崔)를 스페인말로 발음하게 되면 경음과 강한 악센트, 그리고 빠르게 들린다. 서(徐)의 경우는 한국식으로 하자면 '세(Se)'와 'So(소)'의 중간 발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음가를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스페인 발음으로는 본래의 음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스페인식 이름인 사우씨(Sausi), 이씨(Hisi), 낑(Quing), 그리고 낑(King)같은 성은 스페인 성도 아니고 그 발음은 어디 다른 나라, 마치 아프리카의 부족에나 볼 수 있는 언어처럼 소리가 난다.(역주: 이 이름은 전장(前章)에서 설명됐듯이, 한국성 서(徐)에 씨(氏)까지 합쳐져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나온 것 같다.)
그러나 방금 위에 언급한 사례들은 우리들 부모 세대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2세 동포들은 이런 식의 이름에 콤플렉스를 분명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낀(Quin)'이나 '낑(King)'같은 성을 언급하는데, 관공서의 공문서 작성시 김(Kim)이라는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타이피스트의 잘못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정작 한인 당사자는 그런 잘못을 보고도 무심하게 지나쳤든지 아니면 뒤에라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해 이런 결과가 빚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인회의 몰락
이제 유까딴 반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숫자는 많이 죽었다. 이에 따라 한인회의 활동도 전만 못했는데, 특히 한인들이 쿠바의 여러 지방으로 이주한 뒤부터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은 유까딴 지역을 벗어나 낀따나 로오(Quintana Roo)의 체뚜말(Chetumal)로 옮겨, 그곳에서 상업에 종사했다.
아마도 그곳이 한인촌의 많은 사람들이 상업활동을 최초로 시작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유까딴반도에 남아있던 소수의 한인들은 그것에 현혹되어 더 이상 에네껜 자르는 일을 그만두고, 몇몇은 양철공(역주: 양철로 그릇이나 간단한 기구를 만드는 직업)이나 장사를 했고, 몇몇은 멕시코 최남단 체뚜말에서 최북단의 띠후아나(Tijuana) 도시로 흩어져 갔다. 한편 낀따나 로오 지역에서 한인들은 껌의 원료인 치클렛 채취 일을 하기도 했다. 이 노동 일로 그들은 돈도 벌었지만 그것은 계절 노동자의 날품팔이 노동이었고, 게다가 그들은 그 일로 인해 건강까지 해치게 되었다. 싸뽀떼(Chico Zapote: 소난과수(小卯果樹)) 나무에서 수지 채취의 한철인 우기에는 특히 들끓는 벌레들이나 뱀 또는 맹수들로 인해 부상을 당해 심지어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베라끄루스(Veracruz) 주, 아구아 둘세(Agua Dulce)에서
이제 에네껜 잎 자르는 노동이라면 말만 들어도 넌덜머리가 난 나는 다시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도움을 줄 만한 한인회가 혹시 있는지 그리고 신뢰할 만하고 안심해도 좋을 한인 그룹들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아보면서, 베라끄루스 주의 꼬앗사꼬알꼬스(Coatzacoalcos)에 갔다. 그리고는 다시 석유 유전지대가 있었던 아구아 둘세로 갔다. 이 당시 직업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엘 아길라(El Aguila) 멕시코 석유회사에 일자릴 구해 들어갔을 때는 1931년이었다. 거기에서 한 10년 정도 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했고, 그 뒤, 베라끄루스의 미나띠뜰란(Minatitlan)으로 발령을 받아 그리고 옮겼다. 이 당시 멕시코는 주축국(일본, 이탈리아, 독일 및 기타 다른 나라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꼬앗사꼬알꼬스의 한인회 역시 추축국 일본 국민으로서의 분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본부에 서한을 보내는 등, 여러 조치들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한인회는 꼬앗사꼬알꼬스에 거주하는 한인들 각자에게 뱃지를 보냈다. 이렇게 꼬앗사꼬알꼬스의 한인회가 신속하게 활동하고 적시에 대한국민회 본부에 긴급구원을 요청한 것이 멕시코 전역의 모든 한인사회를 움직였다. 한국 국기와 멕시코 국기의 두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이 배지를 한인들은 윗도리의 옷깃이나 아니면 사람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달았는데 그것은 멕시코 당국의 검문으로부터 안전함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록 우리 몸 속에는 한국 피가 흐르고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엄연히 멕시코 국적을 취득한 사람으로서 배지까지 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찌됐든 한국인 부모를 둔 자식으로서 멕시코인을 나타내는 증명서들을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만 했다. 우리들의 얼굴 생김새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가던지 당국의 불심검문을 불시에 당했고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일단 신분이 확인되어 어느 한 고장에서 머무는 동안만큼 우리들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진 않았다. 한국 국적으로 계속 남은 사람들 또한 멕시코 당국의 특별한 주의 없이 그런대로 지냈는데 즉 외국인 신분이라 해서 개인적으로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적의 내통자로 몰려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에게 이런 누명을 씌워 일을 시끄럽게 만든 자는 불행하게도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 한 격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악은 선으로 갚아라."
꼬앗사꼬알꼬스 항구에 도착하자 시몬 공(Simon Kong)씨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이민성에 빨리 가 보게. 스파이라고 고발당했어."
"뭐라고요? 누구지요?"
"누군지 알잖아, 잡히는 데가 없어?"
나는 그 길로 내쳐 이민성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실제로 한 직원이 앉아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는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요? 용건이 뭐요?"
"지금 제가 처해있는 곤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악질적으로 날 모함해 제 결백을 밝히려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 그걸 어떻게 알았소?"
"한인 사회의 한 사람이 그걸 알려 줬지요."
"당신 혹시 신분증이나 체류증(Forma 14)아니면 출생증명서 같은 것 가지고 있소?"
그 관리의 말투는 대단히 위압적이었고 관료적이었다. 나는 즉시 사람들의 권고도 듣고 또 그 당시 정세를 감안해 항상 소지하고 다녔던 서류들을 꺼냈다. 그는 서류들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본 뒤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확실히 멕시코 사람이오. 문제는 당신네 동포들이 괜히 일을 만들어서 그런 것 같소. 당신 출두하길 참 잘했소. 이미 수사관 하나가 당신을 찾기 위해 나갔단 말이요. 만약 그가 당신을 잡아넣었더라면 당시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소. 가보시오."
미나띠뜰란에서
이 일이 있은 후, 나에겐 복수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 1심 판사 하고도 접촉을 가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을 고소하기 전 시몬 공씨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 분은 나에게 모든 것이 무죄로 밝혀진 이상 조용히 놔두는 게 좋을 거라고 나에게 충고했다.
"자네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자네가 이기겠지. 그런데 결국에 가선 자네 마음도 편치 않을 걸세. 자넨 지금 자네가 하고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고 있나? 이 사람아! 무고죄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6년 동안 감방에서 살아야 돼. 그러니 다시 말해두는데 이 사건 전모를 아는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경멸할 테니 그것만으로도 그가 받은 벌은 충분하지 않은가?"
며칠 뒤 한인회에서 보낸 사람 하나가 미나띠뜰란에 도착했다. 그는 나에게 한인회 모임에 나와 달라고 종용했고, 나도 그 모임에 기꺼이 나갔다. 참석한 인원은 열 명도 채 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멕시코시 한인회에서 보낸 편지 내용을 나에게 읽어 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기사였는데 거기에는 그런 못된 자가 있다면 한인회에서 쫓아내라는 것이었다.
나에 관한 사건의 전모는 멕시코의 유력지 하나에 실렸는데, 거기에는 나의 직업, 얼굴, 국적 그리고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 등 나의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실렸다. 기사는 나에 대해서는 어떠한 혐의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제는 한인 사회가 추축국 일본 사람들과 회합을 가졌다고 끝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확한 기사였다. 한인 사회에 멍이 든 나지만, 멕시코가 추축국 세 나라에 대항해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 개인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있을 리 없었고 그와는 정반대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회합을 갖기는 커녕 멕시코에 있는 전(全) 한인회나 모든 한인들은 일본이 조선반도를 합병했을 때부터 일본인들과 우호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한 신문기자의 지어낸 기사 내용으로 인해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한인회 집행부 이사들은 이 기사를 잘못 이해했거나 아니면 그 진위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한글로 문서를 작성해서는 꼬앗사꼬알꼬스의 한인회에 보내 한인 사회에서 나를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이 징계는 내부적으로 이루어졌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한인회가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인회는 공공기관으로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거나, 또는 공인되어 있지도 않은 다시 말해 법적 근거를 전혀 가지지 못했던 단체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내가 일하던 곳에서 적대국3 나라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던 일들을 잠정적으로 정지하라는 포고령이 떨어졌다. 얼굴 생김새나 이름으로 미루어 의심스러운 사람들 역시, 그들의 국적이나 출신지가 밝혀질 때까지 모두가 그런 조치를 감수해야만 했는데, 뒤에 그들은 정유공장에서 재배치되어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었다.
미나띠뜰란 지방재정국 청사 뒤편에 보통 크기의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 우리 모두를 수용시켰다. 인원은 총 8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나와 이곳에서 태어난 원주민 인디오를 포함해 멕시코 국적을 가진 사람도 두 명 있었다.
특히 이 원주민의 경우에 혼동이 일어난 것은 그의 이름 때문이었데 그것은 발음상으로 완전히 외국, 즉 일본 이름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출생지와 3代까지 거슬러 올라가 샅샅이 조사를 받았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한 15일 정도 억류되었고 그 뒤 우리들 둘만 풀려 나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들은 멕시코시로 호송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 또한 정나미가 떨어져 미나띠뜰란에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구아 둘세보다 더 더운 기후에서 일하기가 힘들었고, 또 병때문에 이 곳에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시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해 볼 요량으로 나는 멕시코시에 갔다. 이전에 당한 경험도 있고, 또 나에게 득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한인 사회에 이제는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한편으로 다른 데에 쓸데없이 한 눈을 팔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한인 사회하고 발을 끊은 채 몇 년을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 관계까지 소원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곳 멕시코시에도 한인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1910년, 즉 유까딴 반도에서의 강제노동계약 노동이 끝난 뒤 이곳 멕시코시에도 한인회가 조직된 것으로 알고 있다. 멕시코시 한인회도 여러 다른 지방의 한인회와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지방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가 승인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어찌 됐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내 일 문제로 황보 선생을 거의 매일 같이 만나야만 했다. 당시 황보씨는 한인회 간사장 일을 맡고 계셨는데, 아마 그 직책 때문이었는지 그는 한인회 일에 협력해 달라는 취지에서 한인 피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나보고도 한인회 나오라고 계속 종용을 했었는데 나는 꼬앗사꼬알꼬스의 한인 사회 사람들이 나에게 가한 모함 그리고 멕시코 시에서 나를 두고 벌어진 중상모략을 상기하고는 그에게 그것들을 알려주면서 그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했다.
한인위원회 사람들
그리고 난 뒤 얼마후 세 사람이 갑자기 내 조그마한 가게로 들이닥쳤다. 의례적인 인사를 교환하고 세상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애당초 이런 이야기는 꺼낼 의향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 중하나가 그들이 찾아온 본론을 이야기했다. 즉 한인회 일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과거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기하고는 그들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때 나는 이런 말을 했었다.
"협회를 대표해서 오신 여러분들의 간곡한 요청을 고려해 수락하겠습니다.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헤어지면서 우리들 모두는 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또 봅시다."
나의 각오
그들이 돌아간 뒤 앞으로의 나의 진로를 명확히 하고, 내 자신의 마음가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편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멕시코 국적 및 시민권을 지녔지만 또 한편으로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구별되는 동양인의 내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양친의 한국인 피가 내 몸에도 흐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즉 비록 내 몸은 내가 태어난 여기 이 땅에 속하고, 이런 이유로 나는 멕시코의 한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실제 정신적으로 보면 나는 여전히 한국 사람이었다. 그리고 민족혼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것을 더욱더 내 몸 속에 가득 채우기 위해, 내 인생의 절정기, 이 황금시간을 이런 사회적인 모임에 봉사하는 것도 결코 나쁠 것은 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꼬앗사꼬알꼬스에서 부당하게 일어난 불상사 같은 것이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인회
매월 1일 저녁 열리는 모임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이날이 일반적으로 주중 일하는 날에 끼어 있어 한인회 모임은 매달 첫 번째 일요일에 하기로 그 방침이 정해졌다.
나는 모임(소위 말하는 총회)에 나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출석자가 기껏 10명에서 12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보 선생이 빠질 리 없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 아주 반가워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적은 숫자의 인원을 보고는 실망 안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수년 전 내가 멕시코시 한인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적어도 100명 이상은 참석하리라 기대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멕시코가 주축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 나는 부친의 부음 소식을 듣고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길에 한인회에 들렀다가 모임이 성황리에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그때 생각으로 나는 이 모임은 이전 같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며칠 뒤 황보 선생에게 한인회가 이렇게 쇠퇴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이 여기 왔을 때 우리들은 국적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추축국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취급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우리 조선반도가 섬나라에 합병됐을 때부터 두 나라 국민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들은 우리를 주축국 국민으로 취급하려는 어떠한 기도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한인국민회에 어떤 해결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지요. 몇 달 후 한국 국기와 멕시코 국기가 새겨진 배지들을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우리들은 그 배지를 윗저고리 가슴 깃에 달고 다녔습니다. 일본인들과 우리를 서로 구분 짓기 위해서였지요. 전시 상태가 멕시코에서 해제되면서 감시 활동과 조사가 사라졌고 모든 것이 정상화 됐습니다. 그러자 각자의 개인적 이해가 사라져 당신이 지금 보다시피 한인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줄어들게 된 것이지요."
"전시 기간 중 몇 달간 우리 한인회 집행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복잡한 문제도 많이 생겼으나 회장이셨던 리까르도 이(Ricardo Lee)씨나 섭외담당이셨던 호세 한(Jose Han)씨가 애를 많이 썼지요. 한번은 멕시코 당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통보를 받고 베라끄루스까지 갔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한국어부들이 밤에 배를 타고 놀다가 해변에서 음식을 데우기 위해 숯불을 피웠지요. 돌아오는 길에 감시병들에 의해 곧바로 체포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시 상황에서 멕시코 전 해양에는 실제로 엄중한 경계가 곳곳에 경비병들이 배치되었는지 모른 이 젊은 친구들은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경솔한 행동으로 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멕시코시티에서는 이런 식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회장에 선출되다
내가 한인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지3년이 지났다. 이 3년 동안 회장을 역임했던 사람은 이춘욕(Lee Chun-Yok), 유기린(Yu ki-Rin) 그리고 이경채(Lee Kyung-Che)씨였다. 적어도 이분들의 성함만은 지금도 내가 기억할 수 있다. 매 집행부가 교체될 때 사람들이 언제나 많이 참석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갈 수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새 임원을 뽑을 때가 가까워 오면 다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통례였다. 나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다시 말해 종신(終身) 총무였던 황보 선생이 경험 삼아 나를 후보로 천거했고 나는 별다른 이의 없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내 경우 더 심했던 것이 회장으로 뽑혔을 때 참석자가 열 명도 채 넘지 않았다. 그러나 회장 취임식이 거행되던 날 백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했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다음 해에 있었던 3.1절 행사에는 대충 15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고, 심지어 회관 바깥에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마도 우리 한민족의 그 운동 행사를 기념하러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으리라 생각한다.
이민 50주년 기념행사
같은 해 4월 15일(역주: 1955년은 우리 한인들이 멕시코 땅을 처음으로 밟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날을 맞아 행사준비위원회는 50주년 기념 축제 계획을 짰었고,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참석하였다.
이름뿐인 한인회
기념행사가 끝난 뒤 우리들은 여느 때처럼 멕시코시 게레로 지역의 목떼수마 거리에 있는 한 집에 모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참석하는 사람들, 즉 회장이나 총무, 재무담당 그리고 한두 사람 들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모임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회장을 맡은 지 첫째 달부터, 우리들은 총무이신 황보 선생과 상의 하에 토의사항을 업무일지에 날짜대로 기록하기로 정했다. 그 다음 달부터는 그나마 서로간의 의견이 엇갈려, 기록할 사항조차 없었다. 사실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일지에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셋째 달이 되면서부터는 회비도 걷히지 않고 집세 낼 경비마저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그렇다고 사회적 기부를 하겠노라 나설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들은(회장인 나와 총무이신 황보 선생) 한인회 사무실을 비워주기로 결정했다. 짐이라 해봐야 의자 몇 개, 테이블, 접시 몇 개, 그림 몇 점, 몇 권의 책, 몇몇 노트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이었다. 돈으로 따져봐야 값어치 나가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수년동안 사용해 정든 것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부 옮겼다.
그렇다고 해서 로스앤젤스의 대한인국민회 본부에 멕시코시 한인회 지부로서 의당 해야 할 보고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두세 달은 더 버텨나갔다. 그러는 사이 한인회 일에 그 누구보다 열성이셨고 또 나의 유일한 의논 상대가 되어 주신 황보 선생께서 그만 몸져누우시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머지 일들, 즉 사람들에게 꼭 알려야만 될 공지 사항이 생기면 나 홀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황보 선생
개인적 친분과는 별도로 나는 한인회 일로 황보 선생 댁을 자주 방문했었다. 선생께선 몸이 불편하셔서 외출을 하실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집안에서 모든 직무를 하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 년을 지탱하셨는데 어느 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병이 갑자기 악화되셨다. 가족 모두가 의사를 부르느라 이리저리 뛰어 다녔는데, 내가 의사를 모시고 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가족들은 수혈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의사는 내일 새벽 세시를 넘기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하면서 머리를 저었다. 물론 그는 가족들의 희망대로 그에게 수혈을 했다.
자정 무렵, 이젠 좀 쉴까해서 자리를 떴다. 골목길 끝에 면한 방에서 한참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불현듯 의사가 한 이야기가 떠올라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는 달려갔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돌아가셨던 것이다. 가족들에게 몇 시에 사망하셨냐고 물어보자 가족들은 세시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그만 놀라 자빠질뻔 했다. 그날 새벽 누가 내 방문을 노크했는지, 지금도 자문해 보지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고, 나는 의무감에 한인 사회에 이 불행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통으로 달려갔고, 곧바로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던 몇몇 교민들에게도 알렸다. 그 당시 전화기를 가졌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장례식이 되어서 가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들은 전부 해봐야 김수금씨, 리까르도 리, 그리고 나 세 사람에 불과했다. 반대로 한인 사회와는 관계없는 친구들, 가까운 친지들이 50명 넘게 참석했다.
이런 비정한 풍토를 보고, 나는 옛날 내가 일했던 멕시코 엘 아길라 석유회사의 공산당 노동조합의 총서기이며 노조 지도자였던 한 멕시코 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일당 2.5뻬소에서 3뻬소로 인상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살아서 활동할 동안엔 그는 마치 구세주처럼 여겨졌지만 불행하게도 병으로 죽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600명 노동자 중 고작 4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구아 둘세의 조그만 마을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인간이 배은망덕하다는 것이 아닌가!
영사관의 통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사관으로부터 통보를 하나 받았다. 그것은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국 대사의 영접을 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대사는 중남미 순방 길의 마지막 여정으로 멕시코를 들르게 되어 있었다. 마침내 도착 날이 되자 우리들은 그분을 맞이하러 공항으로 나갔다. 다음날 그분은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 뒤 그분이 떠나기 하루 전 한인회는 답례로 후아나 소우르(Juana K. Sour)여사의 자택에서 순 한국식의 저녁 식사로 그분을 대접했다. 형편이 괜찮은 여러 부인들도 음식을 준비해 왔고 또 음식 장만을 거들었다.
대사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한인회 회장의 인사말이 있은 다음, 대사는 저녁 식사에 초대해 준데 대해 감사의 말을 표명했다. 그리고는 조만간 한국과 멕시코 사이에 외교관계가 맺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렸다. 이런 연유로 그분은 우리에게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작별 인사말 대신에 조만간 곧 올 것이기 때문에 "곧 봅시다"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고 했다.
그분의 인사말이 끝난 뒤 향연이 벌어졌다. 후란시스꼬 김(Fracisco Kim)씨의 기타 연주와 함께 그 날밤 흥은 더해 갔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까지 즐겁게 놀았다.
워싱턴으로부터 직접 통보
며칠 후 나는 한인회 회장 이름으로 보내온 대사관의 첫 번째 공식 서한을 받았다.
그 서한에는 멕시코시 한인회 동포들로부터 받은 융숭한 대접에 감사하며 또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렇게 여러 번 서한을 받았는데 모두가 공적인 업무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하나에는1962년 1월 26일자로 한국과 멕시코 사이에 공식 외교가 맺어졌고, 그런 이유로 멕시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러 4월경 다시 방문하겠다는 통보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3월까지 서신 왕래와 멕시코 한인회에 대한 보조금 명목으로 송금이 계속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로스앤젤스의 한국 영사관으로부터 멕시코에 최초로 부임하러 오는 한국대사를 공항에 나가 영접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아 부득불 여기에 언급할 수 없다. 한인회 집행부 임원들의 노력으로 멕시코의 한인회의 모든 임원들이 동원되어 공항으로 나갔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인회 사업을 뒤에서 여러모로 도와주었던 유일한 사람인 로돌포 김(Rodolfo Kim)씨는 기쁨에 들떠 내일 대사의 환영 리셉션이 호텔 '차뿔떼뻭(Chapultepec)에서 개회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한인회 사람들 모두에게 알렸다. 그날 밤의 파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한 날로 기억될 수 있는데 그럴 것이 한국 역사상 정부대 정부 차원에서 승인된 공식 대표가 멕시코에 처음으로 부임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대사는 예정된 날에 그의 신임장을 제정하지 못했다. 이유는 케네디(Kennedy) 미국 대통령의 멕시코 방문 날짜와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문 일정이 끝난 후에야 신임장 제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광복절
대사가 멕시코에 부임한 지 30일 정도 지나 한국의 광복절 16주년 기념일이 다가왔다.
한인들이 멕시코 땅을 밟은 지 57년 만에 멕시코에 최초의 한국정부 관리가 등장했다. 그 예는 1세로 생존하고 계신 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멕시코에 남아있던 한국문화도 거의 다 사라져 가는 바로 그런 시기였다. 한편 한국 국적을 버리고 2세 동포들의 혼혈화가 증대되던 바로 그런 시기였다. 대사는 국적이 어떻게 되었든 관계없이 한국공동체의 위상을 배증시키고 한국문화를 재생시키며 그리고 한민족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에 역행하는 모든 것들을 타하해 나가자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 분은 동포들이 한국말을 알건 모르건 개의치 않았는데 왜냐하면 한인들 중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 8월 15일 멕시코 주재 한국대사관은 한·멕 협회(CorMex: Corean Mexicano)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던 나를 초대했다. 그 협회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여 미국 로스앤젤스에 있는 한국 영사관이 친선기구로 창설한 것이었다. 나는 그 초대를 받고는 대사관에 갔다. 그리고는 대사께서 독립 영웅 탑에 참배하고 근위대의 사열을 받는 것에 동행했다. 이 식이 끝나자 우리들은 광복 기념일 공식 행사를 위해 임시로 마련된 행사장으로 향했다. 식이 끝나자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우리들은 대사관을 향해 떠났다. 대사께서는 참으로 소탈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지시를 내려도 그것이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들이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참석한 모든 여성들, 즉 대사관 직원들의 부인, 그리고 한인 사회의 여러 부인들이 저녁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인 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대사관에 곧 도착했다. 곧이어 대사께서 식을 주재했다. 식은 사전준비가 없이 즉흥적으로 행해졌다.
· 국기에 대한 경례
· 한국 대통령에 대한 만세 삼창
· 국제연합(유엔)에 대한 만세 삼창
이것이 끝나자 대사께서는 한인 사회에 대한 격려의 말씀과 함께 전쟁 후 한국의 발전 상에 대한 언급을 하셨고 한인 사회의 통합을 다시 한번 역설하셨다.
대사의 말씀이 끝났을 때 나는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특히 얼마 남지 않은 1세 분들을 보니 모두가 우셨는지 손에 손수건을 쥐고 계셨다.
그분들은 참으로 감격했던 모양으로 나는 커다란 인상을 받았다. 대사는 그분들 곁으로 다가가더니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시고는 잠깐이나마 그분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러는 동안 갖가지 음식이 마련되었고 사람들은 종이 쟁반에 각자 먹고 싶은 만큼 음식을 덜어 먹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몇몇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한 무리의 멕시코 젊은이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가지고 온 악기로 멕시코 고유의 춤곡들을 연주했다. 여러 다양한 음악들이 연주되고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자 대사관 직원들은 자기 부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런 다음 모두는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은 전축 레코드판의 가락에 맞춰 한국 춤을 덩실덩실 추어 댔다. 이런 흥겨운 분위기는 다음날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나는 한인회의 공적 일로 대사관을 자주 방문했다. 그러나 나는 주로 영사와 대화했는데, 그것은 그가 한인회 일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영사입니다."
"말씀하시죠."
"한국 갈 준비하세요."
"뭐라고요? 아무 준비도 된게 없는데"
"다른 게 아니고 선생의 한국 왕복 비행기표가 제게 도착했습니다. 남은 문제는 선생의 여권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움직이세요. 이달 말까지는 한국에 들어가셔야만 합니다. 오늘이 9월 25일이니 10월 1일까지는 거기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안절부절이었다. 다음날 나는 여행사에 가서 여행과 관련한 제반 서류 수속을 했다. 출생신고서의 날짜가 늦게 기재되는 바람에 여권을 제때 받지 못할 뻔 했지만 한국 영사관의 우정어린 도움으로 결국 여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중국적의 문제
당연하지만 여권에 기재된 내 이름은 성 그리고 이름 모두가 스페인식 이름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내온 비행기 티켓에는 이름과 성 모두가 내 한국식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여행사에 도착하자 영사는 티켓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행사 직원은 한국 이름이 기재된 티켓을 보고는 나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것을 대조해 보고 여행사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본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인데."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맞소이다. 비행기 티켓에 기재된 이름은 내 한국명이고 여권에 있는 이름은 내 스페인 이름이올시다." 영사가 그것을 확인하자 여행사 직원은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영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영사는 "산체스(Sanchez)라는 성에다 최(Choy)를 덧붙입시다. 그래서 산체스 최(Sanchez Choy)로 합시다. 이러면 됐지요?"라고 말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는 성을 두 개 갖게 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마침내 비행기의 출발 날짜가 다가왔다. 출발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대사님과 영사 그리고 대사관 직원들이 이미 나와 있었다. 그분들을 보니 송구스럽고 이런 분들에게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는 게 어딘가 모르게 거북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분들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이 왜소해지는 것을 더욱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로스앤젤스에 도착했다. 공항 안의 한 의자에 한 시간 이상 앉아 있으니 몇몇 동양인들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한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미국인들에게 스페인어로 말해봤자 그들이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이 동양인들하고는 하다 못해 한자(漢子)를 동원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내 귀에 한국말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하자 그들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대답을 했다.
"누구시죠?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멕시코에서 왔지요. 한국 가는 길입니다."
"아! 그래요! 선생도 초청받으신 분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들 일행은 여러 명이었다. 모두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다가와서는 한국말로 내 이름을 물어보면서 말을 걸어왔다.
"선생이 바로 아무개 선생이군요."
"그런데요. 혹시 선생께서는..."
"저는 최진하올시다. "
그의 이름을 듣자 나는 혼자만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어 그 말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멕시코의 한인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거기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럴 것이 이 최 선생은 신문기자로서 수십 년간 신한민보라는 매주 발간되는 신문의 주간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해외 여러 나라의 한인 사회에서 잘 알려진 분이었다. 나 역시 사실은 그를 만나기 전 한인회 일로 그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을 여기서 말하고 싶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멕시코를 떠날 때부터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나 같지 않았으며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중에 붕 뜬 것처럼 느껴졌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 모두는 정중했고 나에게 친절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사랑하는 멕시코 땅을 다시 밟고서야 기분이 편해질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애국심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밤12시가 되었고 확성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 선생이 나에게 탑승방송이라고 알려주었다. 만나서 반가웠다고 인사를 하고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기내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인회 대표들인지 아니면 일반 여행객들인지 혼자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서로 말 한마디 교환하지 않았다. 이런 채로 우리들은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샌프란시스코, 하와이를 경유, 도쿄에 도착했다. 우리들 모두는 비행기에서 내렸다. 나는 그저 한국 사람들이라고 짐작되는 사람들 뒤를 졸졸 쫓아갔다. 가 보니 그곳은 출입국 창구였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서류를 보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 일행은 중화항공으로 간다는 말을 나는 들었다. 서류 심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아침 10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아침 7시 반경이었다. 어찌됐건 우리들은 비행기에 다시 올라탔다. 비행기 내부는 호화스러웠고 여승무원들은 아주 친절하게 우리들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1시 15분 비행기가 한국 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있었다. 우리들 모두는 비행기에서 내렸고 세관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일행의 꽁무니에 붙어 그들을 따라갔다. 나를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다가와서는 "멕시코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행사 주최측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이 친구는 다른 사람에서 "여봐! 이분도 멕시코에서 오신 대표자래" "제기랄! 무슨 놈의 친구가 입이 이렇게 거칠담." 나는 혼자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세관 직원이 내 가방을 열더니 짐이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말을 들은 내 안내자는 가방을 다시 닫으라고 그 직원에게 지시했다. 다시 말해 이 분은 한인 대표자 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짐 검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짐을 내가 머물게 될 호텔로 옮겨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나에게 아울러 했다.
공항에서 우리들은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한 여성 안내원이 서울의 거리 풍경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들이 호텔에 도착하자 무명용사 기념탑에 헌화를 하러 간다는 공지 사항이 전달되었다. 우리들은 거기 가서 참배한 다음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30여 명이 넘는 한인회 대표들 대부분이 나처럼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귀화해서 거주하는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멕시코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새삼 행복했다. 그 기분은 아직도 여전하다. 비록 내 부모님들이 한국분들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엄연히 여기서 출생한 멕시코인이라는 사실에 있어 말이다. 우리 부모님들께서 여기 멕시코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것처럼 나 또한 멕시코에서 살아갈 작정이다. 여기 고국 동포들은 어떤 차별 없이, 정말로 다정하게 우리를 대해 주었지만 나는 어딘가 모르게 구속감을 느꼈다. 마치 "아가씨!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노래처럼 나의 멕시코가 그리 좋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9시경 주최측의 직원 하나가 나에게 와서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일종의 티켓과 같은 두세 개의 쿠폰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 유통될 수 없는 현금과 같은 것으로 특별히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표찰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으로 나는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의 음식값을 치뤘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쿠폰이 지급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그 직원은 몇몇 봉투를 놓고 가면서 이 말을 잊지 않았다. "꼭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 한국 외무부의 초청장 이외에 국방부의 초청장을 포함해 나에게 방문할 여러 장의 초대장(대통령 관저(청와대) · 국방부 장관 · 문공부 장관 · 문교부 장관 · 중앙정보부장 · 보건사회부 장관)이 전달되었다.
그 뒤 항구도시 인천에서 가까운 한 화약 공장을 방문했고 무슨 종교인지 모르나 한 장관의 초대로 우리들은 인천에서 오찬을 가졌다. 그리고는 국군의 날을 맞아 실전훈련 모습과 국립 경기장에서 벌어진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마지막으로 38 분계선을 방문했다. 그곳에 가기 전, 지나는 길에 군사지역 내에 있는 부대들을 시찰했고 한 부대에서 점심 식사를 대접받았다(벌써 오후 3시가 넘어있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들 시장하리라 믿습니다. 저희들 식사가 어떤 건지 여러분들이 보시고 맛있게 드시기 바랍니다." 나 또한 시장기가 여간 든게 아니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말 제때에 식사가 대접되었던 것이다. 점심으로 나온 음식을 보니 유까딴에서 보냈던 시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음식을 보니 가난했던 그때와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같이 식탁에 앉은 사람들 중 몇몇은 밥은 먹지 않고 영어로 소곤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뽐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사람들은 얼굴은 한국인이었지만 행동은 마치 미국인 흉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예의 때문인지 아니면 배려있는 행동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처럼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다.
국군의 날을 맞아 우리들은 국방부의 만찬회에 초대를 받아 그곳으로 갔다. 당연히 현관 입구에는 국방부 장관과 부인이 앞에 나와 초청 인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연이긴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정장이 아닌 평복들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의례적인 상견례가 이루어졌다. 나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국방부 장관을 그의 집무실에서 접견했을 때 그가 하도 칭찬을 해대는 바람에 몸둘 바를 몰랐었는데 지금 다시 그 광경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장관은 나의 한국어 실력을 부인에게 한창 추켜 올리고 있는 참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에게 인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러 피부색을 가진 각계각층의 사람들 속에 내가 끼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사람이 별로 많이 운집하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인가. 내 등 뒤에서 이런 말이 들렸던 것이다. "각하! 여기 멕시코 대표가 계십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는 즉시 앞으로 나아갔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게 될 줄이야. 나는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이 분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한 이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부인을 부르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부름을 들은 이 우아한 모습의 퍼스트 레이디가 자리로 오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께 인사하시오! 멕시코 대표로서 여기 오신 분이오. 거기서 태어나셨지만 어떻게 한국말을 잘 하시는지 들어보시구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그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뿐이었다. 나와는 반대로 이 부인은 똑똑하고도 낭랑한 목소리로 "이전부터 선생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확인할 수 있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동에 젖었다. 그리고 나서 한 시간이 조금 넘어 우리들은 호텔로 돌아갔다. 나는 호텔 침대에 누운 채 "이전부터 선생님을 알고 있었습니다."라는 퍼스트 레이디의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멕시코 주재 한국 대사께서 나에게 멕시코 한인회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 이름이 한국 사회에서 알려져 있다는 말도 상기했다. 나는 이 말이 사실이었구나 라는 것을 마음속에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다음에 계속
'▷ 멕시코 & 쿠바 이민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바 한인 이민사 (0) | 2021.01.23 |
---|---|
회상 :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노동 / 최병덕 - 4 (0) | 2021.01.19 |
회상 :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노동 / 최병덕 - 2 (0) | 2021.01.18 |
회상 :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노동 / 최병덕 - 1 (0) | 2021.01.18 |
[멕시코 이주 100주년] <5> 희망과 미래 (0) | 2020.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