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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이모저모 .......

□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by 최재민 선교사 2021. 2. 9.




멕시코시티 올림픽









제가 멕시코 선교를 하다 보니... 
자연히 멕시코에 관계된 여러 가지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부터 거의 50년 전인 1968년 10월에 개최되었던 멕시코시티 올림픽- 우리나라 서울 올림픽이 1988년에 개최되었으니 우리보다 딱 20년 전에 개최되었었습니다. 제가 우표들을 좋아하여 Google에서 멕시코시티 올림픽 우표들을 찾다가 다른 사건들도 찾아보게 되었었습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 로고 등 디자인도 아주 독창적입니다. 그 전 올림픽 까지는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여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대해 몇 가지 특징적인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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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latelolco 광장 학살사건 
























1968년 10월 개막된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올림픽 대회 현장에서의 정치적 항의를 제한하는 당국의 조치에 따른 물리적 공권력 집행이 비극적 유혈사태로 귀결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 올림픽 개막이 임박한 10월 초 멕시코시티의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멕시코 정부는 이러한 시위사태가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하여 강제 해산조치를 단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 십(어떤 자료에는 300-400 또는 500)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공권력의 발포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사건 후에도 정부는 언론 통제를 통해 사건의 심각성을 덮으려 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 속의 멕시코의 정치 현실에도 불구하고 IOC는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결정하였다. 
 
위의 사진들을 보면 마치 광주학살 사진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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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 봉송과 점화  





올림픽 성화가 한 수영 선수에 의해 
멕시코 Veracruz 항에 도착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각 대회마다 성화 봉송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 위한 주제가 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성화 봉송의 주제는 “새로운 세계로의 봉송”이었다. ‘새로운 세계(New World)’란 유럽의 입장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의 성화 봉송은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Christopher Columbus를 기리는 ‘기획물’이었다. 그 기획에 맞게 성화 봉송 이어달리기는 세 곳의 거점을 거쳐 갔다. 콜럼버스의 출생지였던 이탈리아 제노바와 그가 항해를 시작한 스페인의 팔로스 항, Columbus가 대서양을 건너 처음으로 상륙한 땅인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가 바로 그 곳이었다. 
 
성화 봉송의 마지막 주자는 멕시코에서 촉망 받던 허들 선수 Norma Enriqueta Basilio Sotelo(20세) 였다. 그는 선수로서의 성과보다는 성화 점화자로서 더 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성화대에 불을 붙인 최초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Enriqueta Basilio는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불을 붙인 뒤 400m 허들, 4x100m 계주, 80m 허들에 출전했지만 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그 뒤 Enriqueta Basilio를 올림픽 선수로서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야야... 
아니 당시에 20세 였으니 저보다 누님이 되네요. 

Norma 누이, 잘 좀 뛰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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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장갑 시위(Black Power Salute)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당시의 어두웠던 면이 드러나기도 했다. 200m 달리기에서 금메달리스트 Tommie Smith와 동메달리스트 John Carlos는 메달 시상식에서 같은 해 4월 4일에 암살당한 Martin Luther King 목사에 대한 추모와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뜻으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검은 장갑을 끼고 하늘에 주먹질을 한 흑인 인권 세레머니를 했는데, 그 행위가 정치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져 그들은 올림픽 선수촌에서 쫓겨나야 했다. 미국에 입국한 뒤에는 미국육상연맹에서 제명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 때 당시의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조금 길지만 모두 인용한다. 
 
“(우리) 흑인들은 기숙사에서 살지도 못했죠. 백인들이 싫어했으니까요. 또한 우리가 들어가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없었고, 캠퍼스 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접근할 수도 없었어요. ... 흑인으로서의 여성은 대학에 들어오기도 힘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흑인)가 파티에 가 춤을 추게 되면 백이면 백 모두 백인 여성과 춤을 춰야 했죠. 흑인 여성이 캠퍼스에 아예 없었으니까요. 더 가관인 것은 장학금을 받고 들어온 흑인 선수들이 캠퍼스에서 쫓겨나기도 했거든요. 이유가 백인 여성과 데이트한 걸 누군가 고소했기 때문이었어요. ... 공부하는 것에서도 차별이 있었어요. 흑인들이 전공하길 강요받았던 과목이 뭔 줄 아십니까? 사회복지와 체육, 범죄학이었어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사회복지는 흑인이 사회에 나가면 복지혜택에 의존해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체육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선수로서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범죄학은 흑인의 속성상 범죄인이 되기 딱 알맞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었죠. 제가 하려 했던 사회학은 정말로 지원하기조차 힘든 전공이었습니다.” 
 
또한 200m에서 2위를 차지한 호주의 Peter Norman 역시 이들과 함께 흑인들의 인권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았다가 역시 예외 없는 처벌을 당하고 말았다. 이 세 선수는 이 일로 인생의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다. 두 흑인 선수는 미국 백인우월단체의 암살 협박에 시달리며 장기간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흑인의 인권이 신장되면서 Tommie Smith와 John Carlos가 인종 차별에 반대한 용기 있는 행위를 한 선각자로 평가받아 이들은 '인권운동의 영웅'으로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런 데에 반해 Peter Norman은 육상경기에서 호주 최초의 메달을 획득한 국민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 회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매스컴으로부터 철저하게 매장당하고 국민들에게도 잊혀 진 존재가 되었으며, 그가 사망하는 그날까지 그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 세 선수는 이 사건 이후로 돈독한 친분을 쌓았고, Peter Norman이 2006년에 사망하자 Tommie Smith와 John Carlos가 호주로 가서 노먼의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 Peter Norman의 사후인 2008년에 그 조카인 Matt Norman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SALUTE” (이 올림픽에서의 검은 장갑 세레머니를 영어로는 ‘Salute’라고 하기도 함)가 공개되면서 사후에나마 겨우 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고, 2012년, 44년 만에 호주 의회는 Peter Norman을 연맹으로부터 퇴출시킨 것에 대해 고인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당시 Tommie와 John의 나이가 23세와 24세 였다는데 젊은 객기(?) 한 번 부렸다가 호되게 값을 치루었네요. 1968년이면 한국의 유신 시대도 아니고 미국에서 나름 낭만도 있던 시대였을텐데 정말 너무했네요. 그리고 호주가 Peter의 사후에 사과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너무했구요. 야, 호주- 너네 정말 너무한거야!!! A,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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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타 
 















* 멕시코시티 올림픽 로고 등 디자인도 아주 독창적입니다. 그 전 올림픽 까지는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 로고와 경기장 안내 등의 디자인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특이하게 기하학적인 디자인한 사람은 Lance Wyman(1937-      )으로 멕시칸이 아닌 미국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멕시코시티 올림픽 로고와 경기장안내 표지판, 우표, 메달 등 매우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1972년의 독일 뮌헨 올림픽 로고도 멕시코시티 올림픽
로고의 영향을 받았는지 상당히 독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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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Lance Wyman이 디자인한 멕시코 올림픽 우표들입니다. 











































한국에서 발행한 멕시코시티 올림픽 우표도 Lance Wyman이 디자인한 멕시코 올림픽 우표의 디자인을 참고한듯 합니다. 이렇게 우표 2장의 디자인이 연결/연속된 우표는 이 전에는 없지 않았나??? 합니다. 이 형식의 우표는 한국에서의 경우 그 후 전국체전 등의 우표 발행시 유행처럼(?) 이렇게 발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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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아름다운 꼴찌” 이야기도 있다. 
마라톤에서 맨 마지막에 들어온 선수는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John Stephen Akhwari) 선수였다. 아크와리는 경주 도중 넘어져서 무릎이 탈골되는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은 당장 병원으로 가서 치료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대를 감는 응급처치만 한 채 끝까지 마라톤을 완주했다. 결승점인 주경기장에 도착하자 기자들은 왜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달렸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아크와리는 “탄자니아는 참가만 하라고 나를 이곳에 보낸 게 아니다. 탄자니아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라고 보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68 Mexico City Olympic Games

https://www.youtube.com/watch?v=pVsQYRZgb10

 


 
- 유호근, ‘현대스포츠 외교사’ 
- 정진욱, 
- 나무위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2017.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