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 이어 계속
기자와의 인터뷰
내가 전몰용사들이 안치된 국립묘지로부터 호텔에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나는 호텔 프런트로부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모를 받았다. 그들을 만나러 나가보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나는 그들이 신문기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호텔 로비의 한 의자에 앉도록 청했다.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 많은 질문들 중의 하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멕시코 한인회 대표로서 여기 머문 8일 동안 어느 오후 한나절을 제외하고는 기자들이 줄기차게 찾아왔는데 도저히 그들로부터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앞서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 하나를 언급했는데, 여기서 나에게 물어온 엉뚱한 질문 하나를 소개해야겠다. "멕시코에서는 아직도 새의 깃을 사용한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나는 이 질문자에게 쏘아붙이듯이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여기 한국에서 본 것처럼 멕시코에서도 매년 종교 축제일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아득한 옛 과거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옛 의상들을 입고 시가 행렬을 벌입니다. 이것 말고도 한국뿐만 아니라 멕시코에서, 아니 전 세계 나라들을 통틀어 볼 때 하나의 문명이라는 것은 각 지역마다의 독특한 문화의 한 잣대가 된다고 믿습니다. 한국 사람들에 있어서 툭하면 터져 나오는 이런 류의 말 선전이 어디서 오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볼 때 멕시코의 나쁜 점이 있다면 멕시코 쪽에서도 한국의 나쁜 점들은 수두룩합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한국이 뒤떨어진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지요. 왜냐고요? 그런 시각은 한국을 알지 못하고 한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모님들은 늘 나에게 한국 문화를 마음속에 주입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여기서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날 신문이 도착해 읽어보니 내가 멕시코를 변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기사가 담당 기자의 의도에 맞추어 게재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나는 주최 측 사람들이 오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있었다. 그들은 계획된 일정에 따라 우리들의 방문지를 안내하곤 했다. 우리들은 대개 서울 시내에서는 운행하지 않는 버스, 다시 말해 우리들처럼 정부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에게 특별히 마련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나는 방을 빠져나와 호텔 프런트를 거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는 의자에 앉았고 커피를 주문했다. 이 호텔 레스토랑은 서양식 식사를 제공하는 지정 식당이었다. 유럽인 얼굴에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장교임이 분명했다. 그는 식당 한 편의 가장자리에 앉았고 나는 다른 편 구석에 가 앉았다. 당연하게도 식당 급사가 곧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른 구석에 앉아 있었던 장교와 마찬가지로 내가 그 시각에 원하는 취향, 즉 커피를 주문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7∼8명쯤 되는 방문객들이 와서는 내 주위를 둘러쌌다. 이런 일은 매일같이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고백하지만 나는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별로 준비해 놓은 것이 없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들의 용건을 들어주었고 협조해 주었다. 그러나 그 장교와 앉아 있는 자리에는 아무도 가까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그의 곁에 보좌관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아침 9시가 되었다. "자, 가지지요"라는 주최 측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였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정중하고 다정하게 잘 갔다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니 나는 예전 유까딴 반도에 살았을 때 어른들께서 "한국인은 우애가 깊은 민족이다."라는 말을 상기 안 할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호텔 응접실에 앉아 있곤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한인 대표들이거나 초청받은 인사들이었다. 한국말은 전혀 못하나 어쨌든 대표로서 온 몇몇 미국화 된 한인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우리들 모두는 여러 다른 국적을 가졌지만 한국인임에는 틀림없었다. 물론 우리들 중에는 한국말은 전혀 못하나 어쨌든 대표로서 온 몇몇 미국계 한인들도 있었다.
우리가 머물던 호텔에서 나는 서양인, 정확히 말해 군복을 입은 백인 미국 병사들을 무수히 볼 수 있었다. 내가 관찰해 본바, 그들 대부분은 동양인 여자들(아마도 한국 여성들일 것이다)을 끼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그들이 호텔 프런트로 가면 직원이나 프런트 담당은 머리를 숙인 채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그저 무뚝뚝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도 기이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장소에서는 모두가 손님을 친절하게 맞아야 하는 게 상례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나에 대해서도 미소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게재라도 되면 줄까지 쳐가며 그 소식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미국 군인들에 대해서는 마음속에서 우러난 상냥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이런 태도가 조심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혐오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위에서 받은 지시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 관습 때문에서인지, 또는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문화 때문인지, 아니면 그 문화의 포기에서 나온 것인지 도대체 말할 수가 없다.
38선 방문
이번 방문 여행 중 한 번은 나는 버스 좌석 하나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몇몇 대표들이 참석을 안 해서였는지 아니면 빠졌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의 하루 일정이 너무나 빡빡하게 짜여 있어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이번 방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치 않은 것 같다. 처음 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말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얼마 안 있어 군인 하나가 내 옆에 앉았다. 내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먼저 인사말을 했다. 이 사람은, 글쎄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대뜸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건네 왔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대답을 했다. 물론 한국말로 말이다. 내가 한국말을 하자 이 친구는 굉장히 기뻐했다. 우리들은 대화를 계속했다.
그는 군사지역 내의 한 곳에 내리더니 그 지역의 책임자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즉시 경비병이 버스를 통과시켰다. 우리들은 거기서 내렸다. 나는 먼저 부대장과 그리고 그곳의 책임 장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부대장은 우리들에게 한국전쟁에서 노획한 군복, 군화, 무기들 그리고 화기, 중화기 등과 같은, 이제는 오래되고 녹슨 군사장비들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38 군사분계선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들이 거쳐온 모든 군사지역에서 이와 똑같은 설명이 있었다. 내가 볼 때 이 부대장은 우리들의 안내를 담당하기는 했지만 그는 군사지역 내 특수부대의 대장쯤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군사지역의 부대장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나는 같이 간 일행 중 그 누구보다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대단한 인물이 못 되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군사분계선에 도착한 우리들은 바위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정상까지 못 미쳐 산 중턱까지 오른 뒤 터널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열을 지어 안으로 계속 앞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쌀과 보릿자루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왜 그것들을 이곳에 쌓아놓고 있느냐고 묻자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서 비축해 놓은 군량이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이 군량미는 언제나 신선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새것으로 바꿔놓는다는 말도 했다. 그곳을 빠져나와 우리들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그곳은 군사지역이라 그런지 개간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잘 갖추어진 참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출구로 다시 나오니 경호대가 우리 주위를 에워쌌다. 동시에 그들 모터사이클 경호대는 서울까지 가는데 아무런 제지가 없게끔 우리들을 안내, 동행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양친께서 나에게 한 이야기를 기억해 내고는 향수 비슷한 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네 어머니는 평양이 고향이고,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들은 충청도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곳에 내 일터가 있었기 때문이지. 평양에는 너의 외가 쪽 조부모님들과 외삼촌들이 살고 계신다. 그런데 지금 그분들 소식을 알 길이 없구나. 그러니 그분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난들 알 수 있겠냐?"
북쪽에 가 내 어머니 쪽 가족들을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런 바람은 내 마음 한 구석을 늘 자리 잡았던 것이다. 아버지 쪽의 친척들은 한국 정부의 배려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가 쪽은 그것이 불가능했고 감히 찾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슬픈 경우들, 즉 국민의 안녕을 위한다는 구실 아래 인위적인 장벽을 씌워 이런 고통을 가증시키는 모든 책임은 정치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경우뿐만 아니라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친척들 역시 틀림없이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 앞에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38분 계선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면서 그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 대부분은 침통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니 그들 역시 나처럼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안함
내가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멀지 않은 것에"조선호텔"이라는 오래된 호텔이 있었다. 외무부 장관의 초대를 받았던 나는 한종원 박사와 함께 그 호텔로 갔다. 도착해 보니 여러 나라에서 온 대표들이 술잔을 손에 든 채 벌써 자리에 운집해 있었다. 그 후 우리 대표들 모두와 장관의 수행원들은 식탁으로 안내되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는 장관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게 되었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50여 명이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장관이 앉을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장관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에게 시선을 주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이 자리를 빌려하시라고 우리에게 청했다.
몇몇 대표들은 듣기 좋은 칭찬의 말들을 했고, 어떤 대표들은 대의 통상과 관련한 문제들, 어떤 대표는 단순히 초대해 준데 대한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어떤 대표는 통역을 통해 영어로 거기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하였다. 나에게도 말할 차례가 돌아왔다. 이런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우선 이렇게 초청해준 데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로 서두를 꺼낸 뒤 멕시코에 사는 한인들의 생활, 멕시코시티 한인회, 그리고 우리들 이후의 세대로부터 한국문화가 점점 사라지면서 훗날 일어날지도 모르는 한인 사회의 쇠퇴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다. 내 이야기의 요점은 다시 말해 멕시코 사람들과 결혼을 하면서 점점 피가 섞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한국 피를 가진 사람은 점점 사라져 결국에 가서는 멕시코 사람으로 동화될 것이며 언젠가는 순수한 한국 피를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 말은 장관이나 참석한 사람들한테는 그리 유쾌하게 들린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숙고해 보았고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 뻔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내가 정치적으로 처신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장밋빛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편, 나는 계속 앉아 있기가 너무도 거북스러워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는 동안 허리의 통증을 덜 요량으로 의자 등에 몸을 푹 기대고 있었지만 실제로 나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자세를 취한 채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때 카메라의 플래시가 내 얼굴에 터졌다. 얼굴은 무안 감에 벌게졌지만 의자에 기댄 채 그대로 눌러앉아 있는 것이 고통 감을 더는 방법이었으므로 달리 도리가 없었다.
우리들은 새벽녘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때까지도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장관께서 답사를 통해 모든 분들이 이야기한 내용은 자기가 판단해볼 때 전부 타당한 이야기라고 하며 그 모임의 끝을 맺었다. 우리에게 제공된 모든 식사 초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날의 음식도 맛이 있었다. 우리들은 만찬 식사를 제공받았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어떤 음식이 특별히 더 맛있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었을 정도로 모든 음식이 다 맛이 있었다. 음식을 제외하고 조선호텔에서 우리들에게 내놓았던 것은 모두 서양식이었다. 테이블과 의자 등이 그랬고 그리고 젓가락 대신에 서양식 식기류 등이 그랬다.
한국에는 서양인들 그리고 우리처럼 호텔에 머물러 있는 서구화된 사람들을 위한 전용시설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이런 곳들은 순전히 외국인을 위한 곳이었는데 레스토랑의 경우 거기에서는 한국 음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미국 스타일이었다. 적어도 나는 유럽식 스튜 요리조차 먹어본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의상도 역시 한국식과 서양용의 두 가지가 공존, 익숙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서양식 옷은 일하러 가는 사람이 입는 옷인데 반해, 한국 옷들은 일하기에는 거추장스러워 보였으며 특히 여자 의상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청결
청결은 개개인 각자의 본질적인 문제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환자나 마부 도는 중간에 어느 곳에 머묾이 없이 장기간의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서 보듯 대부분의 경우 처해진 상황으로 인해 청결에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의사의 지시로 몸을 씻지 못하는 경우나 아니면 이 항구 저 항구를 전전하면서 짐을 싣거나 부리며 한 달 이상이나 소금기 많은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의 경우처럼 물이 없어 그러지 못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내가 직접 경험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국가의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아 단체로 정부 부서를 예방하고 여러 가지 향응들을 만끽하는 개인이 기본적인 소양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한 장관의 초대를 받아 한 한국 음식점에서 오찬을 함께 했는데 그때 나는 심지어 손수건으로 콧구멍을 후비는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방금 언급한 음식점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초대받아 간 모든 음식점에서 나는 우리들 아버지 세대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 한국 전통의 고유한 관습을 볼 수 있었다. 응접실이나 식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상 앞에서는 방석을 깔고 앉으며 두 발을 뒤로하고 두 무릎을 맞대고 꿇어앉고, 또 상 앞에 앉을 때는 모자를 벗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행동은 상에 차려진 음식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보였다. 우리들처럼 서양식 삶에 익숙해진 사람은 식탁에 대한 예절로 모자를 벗는다. 물론 이런 격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보통 격조 있는 식당들에서였다. 우리가 간 곳의 사람 접대하는 솜씨도 각별한 것이었다. 은은하지만 우아하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 또는 젊고 아름다우며 날씬한 몸매를 한 여종업원이 아리따운 미소를 머금고 우리들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좌우 양측으로 두 명씩, 즉 모두 네 명이 그녀의 접대를 받았다. 그녀는 손님들 접시에 음식이 떨어졌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들 또한 당연히 젓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여종업원의 젓가락은 우리들 것보다 두세 배는 큰 젓가락으로, 그녀는 그것으로 식탁 한가운데에 있는 음식들을 집어서 손님들 접시에 나누어주었다.
언젠가 나는 미국인이 다 된 재미교포와 합석하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힘들이지 않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우쭐거리며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멕시코에서 오신 분 같군요."
"그렇소만"
"그런데 젓가락을 아주 잘 다루는군요."
"양친께서 가르쳐 주었소이다."
그때 바로 나는 그가 젓가락을 사용할 줄 몰라 음식을 못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 식탁에는 포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화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설사 식당에서 포크를 준비해 놓고 있더라고 이런 상에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포크를 가져다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 미국인이 다 된 한국인들이 얼마나 오만했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했는데 특히 멕시코에서 온 나한테는 더욱 그랬다.
한(韓) 박사와 이틀간의 만남
8일 동안 우리들은 우리들 부모의 조국 정부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접을 받았다. 이 유쾌하고도 잊을 수 없는 추억들과 함께 나는 조국의 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진정으로 조국이 베풀어준 환대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식 일정이 끝난 다음 날 우리들은 여권을 돌려받았다. 우리들은 이 여권으로 한국에서 15일은 더 체재할 수 있었다.
공식행사가 끝나 우리들이 자유롭게 된 것을 안 한 박사께서 곧 나를 찾아와서는 시내 관광을 하자고 권유했다. 나 역시 이 도시에 대해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우리들은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걷기로 했다. 그는 나를 사람들이 붐비는 상가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마치 멕시코의 백화점과 유사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도자기나 여성의 옷감으로 사용되는 고운 천, 즉 비단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상점이 즐비한 곳에서 인삼 뿌리만 파는 상점을 볼 수 있었다. 강장식품으로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는 이 뿌리는 송도라고 불리는 지방에서만 생산된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유까딴에 이런 인삼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때 마치 조그마한 모자를 씌운 것 같은 10㎝ 정도 길이의 뿌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투명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조그마한 모자를 씌운 것으로 보아 마치 원숭이 같았었다고 기억한다. 옷을 입힌 것으로 보아 이 언급한 이 두 인삼이 최고의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쁘게 꾸며지고 장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이들 인삼은 인형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아마도 우리 어른들께서는 이 뿌리들을 백인삼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백(PEK)은 '하얀' 또는 '흰빛을 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인(IN)은 '사람', 그리고 삼(SAM)은 '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삼'은 여러 다양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초록색 잎을 가진 보리는 기적, 건강을 북돋워 주는 기적 같은 강장제이다. 유리 용기에 담겨 상점에 진열된 사람 크기의 그 인삼을 본 나는 호기심이 부쩍 일어났다.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 하나를 생각해 냈다. 무더운 오후가 되면, 특히, 가을철 저녁때, 어른들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자리에 앉아서는 산에서 자라는 인삼 뿌리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었다. 이 산삼을 발견하는 "행운"을 가졌던 사람은 문자 그대로 일확천금을 쥐었고,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뿔이 약간 돋아난 어린 사슴을 사냥했었는데 이미 그들은 이 뿔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뿔들은 인삼의 잎에서 나오는 영양분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들은 뿔이 의약재로 사용될 수 있도록 그것을 잘 보존했던 것이다. 한 지나가던 길손이 우연히 인삼 뿌리나 잎을 먹게 되면 그는 잠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뒤 깨어 일어나 보면 이 인삼 뿌리의 약효에 의해 몸의 세포 구멍이나 모공에 붉은 반점들이 돋아났다고 한다.
황금종
한참 후 우리들은 좀 더 걸었다. 그러다가 한 박사는 커다란 종이 놓여 있는 한 비각을 가리켰다. 경비원은 없는 것 같았다. 어림해보니 높이가 일 미터 칠십에서 팔십 정도고 둘레가 3 m 정도 되는 종이었다..
유까딴 농장에서 살았을 때 나 역시 이 종에 관해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종은 순금으로 주조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꺼내서 소리를 내보고 쳐보니 아무런 울림도 없고 소리도 나지 않자 결국 그것을 부쉈고 그런 다음 그것을 다시 녹이기 위해 도가니에 집어넣고 열을 가할 즈음 갑자기 한 어린아이가 그 속에 빠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린아이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었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순전한 사고였다고 말했다. 어찌 됐든 사람의 몸과 금속이 서로 융해되어 섞인 뒤 그 뜨거운 물을 다시 주형에 부어 넣고 식힌 다음 종이 만들어졌다. 그것을 다시 쳐보니 소리가 사방으로 진동하고 울려 퍼졌다. 한편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터졌지만 그 어린아이의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잠겨야만 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금종이 울고 있다"또는 "금종 속에서 인간의 외침"을 의미하는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든 '인경'이라는 이름이 이 종에 붙여진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40년 가까이 외국의 지배 속에서 고통을 당했던 한 민족이 이렇게도 귀중한 금종을 어떻게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본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정복은 완전한 억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이 유서 깊은 종을 보고 난 뒤 우리들은 발길이 닿는 데로 시내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그런 다음 한 대학을 방문, 한 박사와 교분이 두터운 학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 박사 역시 멕시코에 있는 한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에 와서는 외국어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점심을 먹은 후 호텔로 돌아왔다. 그때 호텔 프런트에서 전갈을 받았다. 놀랍게도 25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었고, 얼마 동안 기다리다가 나를 만나지도 못한 채 그냥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일단의 학생들이 내가 머물고 있었던 호텔로 찾아온 것은 아마도 한 박사의 초대를 받아 내가 그 대학을 방문한 것이 그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나는 많지는 않지만 학생들과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 박사가 나를 그저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줄만 알았는데 웬걸 그는 나에게 한 마디 하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다음 스페인어로 몇 마디 이야기를 짧게 했었다. 그중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말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여러분들! 나는 당신들이 학생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열렬하게 축하합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학생 신분이지만 훗날 여러분들은 인재로서 조국을 떠맡게 될 것입니다. 조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악한 정부가 아닌 좋은 정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특별히 노력을 경주, 대성하기를 기원합니다." 한 박사가 학생들에게 내 말을 다시 한국어로 통역해주었다.
그들과 작별을 고한 다음 우리들은 호텔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나는 한 박사에게 내일 멕시코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박사는 왜 이렇게 일찍 떠나느냐고 하면서 좀 더 머문 뒤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가라고 말했다. 게다가 다시 오기도 쉽지 않은 여행인데 온 김에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도와 현재 한국 제일의 항구도시인 부산에 꼭 가 볼 것을 권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내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미 내일 출발한다는 사실을 이미 통보했고, 또 두 번째로는 후아레스 시(프론 떼라 주)에서 살고 있는 조카 뻬드로로부터 빌린 노자돈도 이제 다 떨어져 더 이상 머물 처지가 안된다고 실토하였다. 사정이 이러니 빨리 돌아가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작별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한 박사는 부인과 함께 호텔로 왔다
.
시간이 되어 우리들은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그곳에서 내 형과 그리고 사촌들과 해후할 수 있었다. 장내 탑승 방송이 들렸고, 나는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만남은 서먹하기 그지없었다.
도쿄
도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의 이민국 관리가 영어로 물었다. 그의 말을 못 알아듣자 이 직원의 얼굴에서 피곤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얼마 후 나는 나처럼 귀국길에 있었던 대표단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잃어버릴세라 이 사람의 꽁무니를 쫓았고 호텔까지 따라갔다. 그 호텔은 최고급 호텔 중의 하나로서 그가 들어간 방에는 침대가 따로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방에 머무는 수밖에 없었다. 뒤에 나는 이 호텔에서 또 다른 대표들도 만났는데 이들 모두는 돈푼깨나 있는 친구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일본어와 영어를 모르는 데다가 게다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위에 말한 그 사람밖에 없으니 천상 그 사람의 뒤만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우리들은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영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나는 통역의 도움을 준 그 신사가 동행해 주어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그가 갈 곳으로 갔다. 그 뒤 나는 로스앤젤스로 갔는데, 이곳에서도 나는 언어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아마도 시내 중심가에 있었던 클라크(Klark) 호텔(발음이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인즉 그 호텔에 머물려고 정한 것은 공항 직원 중의 하나가 그 호텔로 가면 스페인말이 통한다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호텔에 가 보니 영어로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스페인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이미 공항에서 이 호텔의 방을 예약해 놓았다는 내용을 글로 써서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하면서 글로 쓴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음 날 아침 호텔 프런트에 식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호텔 옆에 위치한 조그만 음식점을 가르쳐 주었다. 몇 걸음 걸어가 보니 동양 음식점, 즉 중국 식당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간단한 영어로 그들에게 스페인 말만 할 줄 안다고 말을 건네자 식당 종업원 하나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사람 하나가 곧바로 나오더니 나에게 스페인말로 말하는 것이었다. 거의 2주 만에 스페인 말을 들으니 온 세상이 내 앞에 활짝 펼쳐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뭔가 먹어야 하겠는데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음식, 아니 어떤 종류의 음식을 원하십니까?"
"멕시코 스타일 음식이 있는지 모르겠구려."
"물론 있고 말고요. 비프스테이크, 밀라네사(역주: ), 또 이것 말고 몇몇 달착지근한 음식도 있습니다."
"그러면 비프스테이크가 좋겠소. 물론 감자와 기름에 튀긴 프리홀(역자주: 강낭콩 종류)을 곁들여서 말이요. 그리고 커피와 콩도 갖다 주시고."
"그런 콩은 여기에 없으니 멕시코식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다른 접시에 가져오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내가 주문한 것을 모두 만들어 가지고 왔지만 멕시코 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입맛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배가 하도 고파 그것을 다 먹어 치웠다. 예의 그 종업원은 스페인어를 꽤나 말하고 싶었던지, 아니면 호기심 때문이었던지 식탁에 자리를 같이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그는 멕시코 사람이었다.
그는 이곳의 인종차별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즉 로스앤젤스로부터 남부지역에 걸쳐 멕시코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종차별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내가 호텔에서 당한 차별도 똑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때 나는 미나뜰란 정유소와 베라끄루스주의 아구아둘세에서 미국인들이 자행했던 행동들이 기억났다. 멕시코 정부가 석유 정유공장인 '엘 아길라' 멕시코 석유회사의 멕시코 국유화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고, 아구아 둘세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내가 직접 목격했었다.
미국인이 소유했던 공장을 강제 수용했을 때 미국인들이 원한을 품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엄연히 정부대 정부 간의 협정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과 현지 피고용자 관계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백 명 가까운 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주인들로서 모두는 멕시코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멕시코를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동안 시중을 들어온 하인들을 내쫓았다. 또 그들은 지녔던 물건들을 가지고 갈 수 없게 되자 그것들을 남기고 떠나는 대신 모두 소각해 버렸다. 잉크류나 다른 집기류를 부숴 버렸고 접시나 그릇 같은 도기류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그릇 밑바닥에 용접용 유동액을 부었다. 이것을 본 가난한 멕시코 부인네들이 그곳으로 가 몇몇 물건들을 자기들 집으로 가져가고자 했지만 그 물건들을 집어 오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인들로부터 조롱만 실컷 당했다.
"이것도 사람의 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인간이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요. 자기들 것이니 자기들 마음대로 깨부수건 무얼 하건 좋습니다. 그러나 선생 이야기대로 그들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아니면 그들이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은 하인들에게 선물한다고 해서 어디가 덧나는 것은 아니지요."
"이곳에 멕시코 피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그들의 피부색을 보면 미국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데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어를 하지 않더군요. 정말 그들은 스페인어를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 사람들 중 70%가 멕시코계이고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네 동족들을 깔보며 자기네들은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무지에서 온 소치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인종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의도적으로 감춘다거나 행동한다고 해서 될 말인가요?"
이러는 사이에 식사하러 온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는 자리를 떴다. 나도 거기를 나와 한 슈퍼마켓 들어갔다. 호기심도 있었고 적당한 것이 있으면 살 생각에 값싼 물건들을 이리저리 뒤져보고 있었다. 내가 물건들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을 때 점원 아가씨 하나가 다가와서는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원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묻는 거라고 판단, 그녀에게 나는 스페인 말과 한국말밖에 못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스페인어로 자기 아버지는 멕시코 사람이고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이며, 여기 로스앤젤스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페인어는 잘하지 못하지만 띠후아나에는 자주 갔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원하는 물건이 없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여점원은 나에게 상당히 친절하게 대했는데 아마도 내가 한국인 양친을 둔 멕시코 사람이라고 말했던지 아니면 내가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해 주었던 것이 아닌가 확신한다.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스페인말로 떠드는 소리가 내 귓전에 들려왔다. 두 여자가 자리에 없는 어떤 여자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소리였다. 그들이 쓰는 스페인어는 형편없는 스페인어였다. 게다가 함부로 내뱉는 상말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한 여자가 떠나자 말을 걸었다.
"아가씨! 이것하고, 저것 하나 주시오."
내가 스페인어로 말을 하자 그녀의 안색이 바뀌었다. 안색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으리라.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어디 사람입니까?"
"멕시코 사람이요. 그렇게 안 보이지요?. 신경 쓸 것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부모가 한국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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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건값을 카운터에 지불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내가 이틀 동안 머물렀던 이 호텔, 바로 이곳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 물론 상점 점원들로부터는 그런 대우는 받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접촉했던 사람들이 호텔에서 본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모습을 지닌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어서 그랬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아니면 그들은 비록 경제적인 지위가 낮기는 했지만 그들의 문화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달리 생각해 보면 동양인 얼굴을 한 내가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이 그들이 그런 편견을 해소하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판단
생각해 보면, 인류의 출현이래 권력이라는 것은 계속 행사되어 왔다. 그리고 인간이 많아지면서 경계선이라는 것도 그어졌다. 뒤에 가서는 이렇게 서로 떨어진 집단 구성원들의 자유를 위해 소위 "국경"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역사를 통해 힘 있는 자들은 그들의 힘을 바탕으로 침략을 자행, 피정복민들을 분리시키고 피정복 민중들에게 지배자의 교육을 주입시켰다. 한편 선전을 통해 그들의 속임수를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우월의식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그런데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 지배자들은 피정복민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정당한 재산을 강탈했다. 미합중국의 경우가 좋은 예인데 그들은 사악한 범죄행위를 저질러 궁극적으로는 피정복민들을 멸절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붉은 피부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새로운 이주자들이 신대륙에 도래했을 때 그곳에는 약 100만 명에 가까운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수는 단지 20만 명(대강 계산하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 당시 소수의 비슷한 타 종족이 지금 얼마만큼 인구증가를 했는지 감안해볼 때 그리고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 그들 인디언의 수는 적어도 2천만이나 3천만으로 늘어났어야만 했다. 이것은 동류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인류애도 없이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 대량학살을 자행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이성을 갖추었다 해도 그들은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사는 곳 역시 동물의 왕국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인간을 내가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들 인간의 본성은 동물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열등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동물은 포식하면 만족하지만 인간의 그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 공격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동물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방어를 하게 된다. 그들은 인간들처럼 끝없는 탐욕으로 아니면 심심풀이로 방어능력이 없는 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같은 동물들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침략을 자행해 그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결국 인류를 멸절시킨 것이 아닌가! 이런 사람들을 우리들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국가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그 국가라는 것들은 지구 상의 5색(五色) 인종 중 하나를 살릴 수는 없었던 것인가? 왜 그런 학살을 막거나 그것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지 못하는가? 그들 인디언 역시 아메리카 합중국 영토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외국인이 타국의 내부 문제에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들 역시 엄연한 인류의 하나고 더구나 '침략자가 아닌' 토착 원주민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어떤 민족이 자기의 정치적인 관할권 안에 있다고 그 인간들에 개입하여, 대량학살, 심지어 멸종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족속은 수 세기에 걸쳐 획득한 힘으로 기만과 횡포, 암살 수단을 동원하여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자본의 60% 이상을 점유, 팽창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들 나라는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그들로부터 해방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잘못은 민중들을 착취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고자 했던 위정자 측에 있다. 다시 말해 원탁에 둘러앉은 신문 기자들이 펴낸 잡지 기사가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인류애! 위정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나라들의 위정자의 역사를 상기시켜 볼 필요가 있다. 어떤 한 정치가가 자국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고자 하면 돈으로 고용된 살인 청부업자가 출현하여 이 선량한 정치가를 제거한다. 이런 이유로 약소국은 무엇하나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그들 강대국들만이 이 세계의 주인들인 것이다. 현재 이 시점에서는 그런 나라들은 미국,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다.
지금 유까딴 주 메리다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본다. 그때 나는 개신 교회에 나갔었다. 설교 시간에 목사께서 뿔이 열 개 달린 양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꺼내시고는 그중에서 가장 큰 뿔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미국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제일 먼저 사라질 것이다. 내가 하는 이 말은 실상 내 말이 아니고 기원전 7세기경 예언자 다니엘이 한 말이다."
이 목사님은 백발에 한 60세쯤 되어 보였던 분으로 스페인어 통역을 옆에 둔 채 영어로 설교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니엘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는 것 같은데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제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방금 언급한 이것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여러 분야의 출판물을 통해서 알려진 사실들로 아마 그대부터 이미 사람들을 지배하는 생각인 것이다.
다시 붉은 피부를 지닌 사람들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왜 각국 정부는 미국 정부로 하여금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끔 일정한 땅을 제공해 주고 그들에게 한나라로서의 자치권을 부여하여 살인자들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게끔 하여 생존해 있는 이 붉은 피부의 족속이 그들을 뿌리를 유지하고 토지를 보존할 수 있게끔 필요한 여러 조치들을 강구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만약 이런 노력들을 기울였다면 현재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한 종족을 구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미래에는 인간에게 뭔가 유익한 기념비적인 것을 남겼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귀국 보고
어찌 됐든 탈진된 상태로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더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다음날까지 호텔에 체크인했다. 나는 다시 이 호텔 종업원들의 불친절한 접대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영어를 몰라서 아마도 이런 대접을 받았을 테지만 내가 엄연히 이 호텔의 손님이라는 입장을 고려했더라면 사실은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은 가능했을 것이다. 공항에 도착, 아침을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었는데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말은 오로지 계란, 커피, 빵뿐이었다. 다른 것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천상 이것들을 주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옆자리로 스페인계 멕시코인으로 보이는 여행객 하나가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을 보고는 나에게 스페인어로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무거나 주문하라고 도움말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제야 나는 음식들을 주문했고, 식욕을 채울 수 있었다.
"멕시코에 가십니까?"
"예, 그런데요, 선생께서도?"
"저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사십니까?"
"예! 선생께선?"
"저는 과달라하라까지 갑니다."
"멕시코 제2 도시지요?"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우리들은 식사를 끝냈고 헤어졌다.
나는 결국 멕시코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대사님을 방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사님은 한국에서의 내 일거일동을 쭉 알고 계셨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들 모두는 한인회 회장과 한인회 멕시코 대표 자격으로 간 나의 여행 보고를 듣기 위한 총회 날짜를 기다렸다.
그날이 오자 협회 장소가 비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참석했다.
사실 이상의 것을 보다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나는 종합적이고 간결하게 보고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사님께서 곧바로 한 말씀하셨다. 대사께서는 우선 나의 귀국을 축하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아량 있는 정책을 찬양했다. 그리고는 현 정부의 임기(1962년) 중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의 발전상을 강조하면서 산업발전과 그로 인한 국민의 복지가 향상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 말이 끝나자 간단한 음료 다과류가 제공되었고 회관 안쪽에서는 댄스 음악이 연주되었다. 내가 한인회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그리고 알프레도 김 씨가 내 뒤를 이어 새 한인회장으로 선출된 첫 3개월 동안에, 우리들은 한인회 모임에 대해 어떠한 불화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인회 분위기는 점점 식어만 갔다. 우리들은 한인회 회원들이 왜 그렇게 모임에 불참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회원들이 자기들하고 상관없는 중요하지 않은 모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그랬지 않나 싶다. 경축일에 초대를 받아 한인회관이나 대사관에서 모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날만은 오로지 흥겨운 날이었던 것이다.
한인회 이사회 선거
차기 임원들을 뽑을 새 선거가 있을 거라고 공지되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하게 충분한 인원이 모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건 참석한 성원들의 승인 아래 나는 회장으로 재 선출되었다.
다음 달 대사님께서 한국으로 귀국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 귀국 사실이 확인되자 한인회가 소집되었고 우리들은 시내 중심가의 동양 음식점에서 마리아치를 불러 멕시코 음악과 함께 송별 연회를 가졌다.
이튿날 많은 사람들이 공항에 나가 대사님과 가족을 전송했다.
새로 부임해 오는 대사의 도착 소식이 알려졌고, 다시 교민회가 소집되었다. 공항으로 영접 키 위한 10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 공항으로 가 그를 영접했다. 나는 일신상의 이유로 정확히 말하자면 병 때문에 한인회 회장직과 떠나간 대사님의 추천으로 그동안 맡았던 한국어 교실의 명예직 선생 자리도 내놓았다.
회장직을 사임한 후 몇 주 되지 않아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즉시 대사관에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필요한 사항이 있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특히나 이렇게 몸이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괜스레 헛수고하지 말라고 알렸다. 가끔 교민회 일로 영사가 나를 찾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백 하지만 이 통보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입원 한 다음 날부터 대사관 직원들이 일부러 나를 찾아주었던 것이다. 수술을 받기 바로 전날 뜻밖에도 대사님께서 병문안을 오셨다.
어느 누구한테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지위가 높은 분의 관심을 받게 되다 보니 크나큰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느꼈다.
육군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중, 여느 때처럼 대사관 참사께서 방문하셨다. 그는 대화 중 나에게 병원장의 추천을 받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고마운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특권을 가진 것만 해도 나에게는 과분한 일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나의 경우, 양자가 군대에 복무하니 거기에 상응하는 대접만 받으면 되고 규정을 넘어선 특별 대우는 편안 감보다는 도리어 나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고 대답했다.
감사의 말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는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는데도 나는 에 부족함이 없이 이 하늘 아래, 땅 위에 발을 딛고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모두가 어떤 전지전능한 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인간이 이룩한 의술 효과 군의관인 엔리께 뻬냐 이 뻬냐 장군의 치료, 오천석 대사님의 문병, 마지막으로 살겠다는 나의 마음가짐도 덧붙일 수 있겠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내가 입원해서 수술을 받을 때까지 나보다 앞서 10명의 환자가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그들 모두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죽음을 의사에게 탓을 돌리기보다는 환자 자신들에게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은 수술용 메스가 가해지는 것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수술실로 옮겨졌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사망자가 누군지를 알고 난 다음 나는 별다른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수술 결정을 내리는데 이만저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술에 동의하면 살 기회가 다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면 흙구덩이에 묻히거나 아니면 화장터로 보내질 것을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의사의 물음에 나는 수술에 동의한다고 대답했고 이렇게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우상범 목사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대사관을 방문, 감사를 드렸다. 거기서 나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한 청년을 만났다. 나는 그가 대사관 직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도미니크파 교회'에 속한 목사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는 나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목회 활동을 시작할 예정으로 내가 예배에 나와 주었으면 바란다고 했고 도 장소와 시간에 대해서는 예배 전에 미리 연락해 주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지체함이 없이 이 힘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교회가 곧 세워질 것이라고 알렸고 앞으로 고정적으로 올 신자들이나 관심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한인사회 사람들이 아니라 주로 대사관 직원이나 그 가족들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믿음 상의 차이, 즉 교회가 서로 다른 데서 기인했던 것 같다. 이런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천석 대사 재임 시절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갔다. 그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야유회 날을 마련해 흥겹게 놀면서 또 야외에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멕시코에서 정식 등록되어 설립된 한국 교회로서는 이 교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않나 싶다. 유까딴 지방에도 교회가 있어 그들의 복음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본당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정식 교회로서의 성격을 지니지 못했다.
멕시코 시티에 세워진 이 정식 교회는 한인 대사관 직원들이 교체가 되면서 얼마 안 있어 참석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저조하자 우 목사는 활동무대를 다른 곳에서 찾았는데 나는 그의 이런 입장을 이해한다. 나는 바하 칼리포르니아주(baja California) 티후아나(Tijuana)에서 그를 만났던 것이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 교민이 살고 있었고 정식으로 등록된 교민회가 있었다.
이 교민회는 참으로 잘 조직된 단체로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우 목사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그곳의 한인들 중에서 도미니크파 사람들은 없었고 다른 교파, 다시 말해 그리스도재림파, 안식교 신자들, 그리고 기타 여러 파들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은 바로 정의(원조)고 그 정의가 그 정의가 바로 논리로 이어지고, 그 논리는 바로 힘의 논리로, 그리고 경제적 "원조"로 이어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식으로 정의와 논리는 갈수록 공고해진다. 왜냐하면 정의나 논리가 그렇듯 돈가 권력이라는 것은 서로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둘은 서로를 감싸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이런 일들이 바로 멕시코의 한인 교회에서 일어났다. 독실한 신자셨던 대사께서 한국으로 떠나자 권력을 추종하던 부하 직원들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신자는 더더욱 아닌 단지 충성심에 그렇게 따라다닌 사람들로 판명이 났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인회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에는 나갔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온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엄밀하게 말해 신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교회의 형제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신에 공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목사님의 각별한 배려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에 나갔다. 목사님 자신도 내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의 때문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교회는 출석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면서 존폐의 지경에 놓여 있었다. 한인회에서는 새 이사회를 구성할 지도부의 교체가 있었다. 나는 한인회관에 대한 안건과 그것과 관련된 기부금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있던 서한을 통해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사회적인 선(善)으로 보았기 때문에 막 건축 중에 있는 대지를 주저 없이 한인회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기부는 내가 그것을 제공한 날로부터 1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즉 공공 가옥에 대한 등기가 어려웠던 것인데 아마도 한인회 이름으로 등록 시 기재한 '대한국민(Nacional Coreana)'이라는 문구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멕시코에 한국 조직을 가진 사람이 아직은 있거나 도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타지에서 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인회 이름을 그렇게 바꾸어서 등기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나는 한국 혈통을 갖지 못한 인물이 한인회 회장에 선출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출신지에 모든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피를 가진 사람이라야 실제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으며, 보다 책임감이 있으며, 맡은 바 임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있으며 성실하게 신뢰감을 구축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혼혈로 인한 멕시코인, 정확하게 말해서 메스티소화된 한국인들 자체가 없는 순수 한인교민회의 경우와는 경우가 아주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도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또 내가 들은 바지만 대사관도 마찬가지로 그 모임을 멕시코 피가 섞인 한인교민회가 아니라 순수 멕시코인들의 모임으로 간주, 더 이상 지원금을 주지 않기로 검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교민들이 한국어를 모른다거나 한국문화를 잃었다거나, 한국 관습을 모른다고 하는 것들은 대사관의 입장에서 볼 때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의 현재 어떤 국적을 가졌건 간에 한국인 피를 지니고 있다면 이 사실만으로 교민회에 계속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4년 전의 일로서 한인회 회장이 교민회 건으로 회담을 통해 자문을 구해 왔다. 그것에 대해 나는 대사관의 보조금이 계속 지원되는 한 한인회는 존속할 것이라는 의견을 써서 보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악의를 가진 인간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우려한 것은 교민회 돌아가는 사정을 바라보니 정말 최악의 조짐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쇠락은 내가 교민회관을 위해 땅을 기부했던 바로 전해부터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실 오늘까지는 나의 기증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문서로 작성해 놓지 않았는데 여러 의견의 차이로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즉 어떤 사람은 출신 성분 때문에, 어떤 이는 거리가 멀어서 참석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또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 때문에 한자리에 모이질 못했다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한인회 집행부는 방금 언급한 이런 여러 이유들로 해서 아직까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10년 이래 유까딴의 메리다를 필두로 해서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이 살고 있었던 멕시코 전역에 걸쳐 교민회가 세워졌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하 칼리포르니아주의 티후아나 교민회를 제외하고는 안정적으로 유지된 교민회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멕시코 시티의 한 교민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희망을 걸었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상태가 굳혀진다면 다시 시도해 본들 옛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세대부터는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서서히 민족의 순수성을 잃고 있으며 혼혈이 시작되어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붉은 피부"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은 여기에서 예외가 된다. 그들은 다른 대륙에서 유입된 이방 종족의 처해진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영토에서 멸절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이 세계에서 다섯 피부색을 가진 인종 중 한 인종은 사라지고 있으며 네 인종만 남게 될 것이다. 한편 현재 기존의 강대국들이 멕시코나 알래스카 때 그랬던 것처럼 땅을 사서 일정한 영토를 그들에게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독립할 수 있게끔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면 그들은 침략자들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사실 멕시코나 알래스카는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위정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임수, 공갈, 매수, 살인을 동원해 강탈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인종들은 마치 열등한 존재로 다룬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역사, 즉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서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일들이 잘 말해줄 것이다.
우리들이 과거를 곰곰이 반추해 보면 북쪽의 거인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제공한 원조라는 것도 두말할 필요 없이 껍질만 남겨 놓고 알맹이는 죄다 가져간 한낮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쯤에 한국 잡지들을 통해 내가 읽었던 것들 중 기억나는 것만을 적어보고자 한다.
"1905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대주었다. 이 일본인들은 그들의 섬나라로 귀국하면서 조선의 모든 정황을 면밀히 조사해 두었다. 바로 이때 한반도를 차지하겠다는 야욕이 생겼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우선 미국과 협의했고, 미국인들은 마치 그들의 소유물에 대해 허가하는 것처럼 쾌히 일본의 그 기도를 허락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협정으로 고무된 일본인들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교활한 책략과 간계를 품고서 조선에 와서 조선 정부와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아마도 조선의 국무 대신이 여기에 서명을 했다. 아무튼 제일 협약의 일곱 조항으로 조선은 나라의 7개 주요 자원들을 그들에게 양도해야만 했고 제2 협약의 여덟 조항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완전히 부속되는 결과를 빚었다. 그 뒤 이(李) 황제를 마치 망명객처럼 도쿄로 볼모로 잡아갔다. 확신하건대, 이분은 얼마 전(2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의 유해는 서울로 보내졌다.
당시의 무능한 정부 때문에 힘 있는 한국인들을 일본인들은 어떻게 다루었나?
조선 정부로부터 무장해제 명령을 받은 몇몇 군인들은 수중에 있던 무기들을 들고 일어났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이미 일본군인들이 구름같이 밀려 들어와 한 사람, 한 사람 조선 민중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자유를 빼앗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갖가지 무법 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 민중으로부터 약탈한 재산과 토지가 원래 주인이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탈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엄중한 경계가 펼쳐졌다. 침략자들의 새로운 정부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재산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것도 침략자들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그랬다. 그것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차단,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체포해 수용소에 넣어 강제노동을 시켰고,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힘에 굴복된 순응주의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말로 못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들은 발로 걷어 차였고, 개머리판으로 얻어터졌다. 이런 폭행하고는 별도로 여자들은 그들의 짐승 같은 성의 제물로 희생당했다. 이런 식으로 조선 민족은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침묵을 강요당했다. 말하자면 침략자에 대항한 어떤 혁명적인 움직임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이런 침략을 반대한 움직임과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칭찬할 말한 일이다.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스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그리고 중국의 상해에는 한인의 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중 상해는 조국광복을 위한 밀정들의 거점이었다. 그들은 거지나 행상인, 또는 선교사로 위장해 한국에 들어가 사전 지령을 전달하고 또 그것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한국 내에서의 그들의 애국적인 활동은 도처에 깔려있는 밀정들, 주구, 변절자들 때문에 쉽지 않았는데 그들이 이들의 활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형제끼리 이야기하는데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왜냐하면 적들이 고용한 밀정꾼들이 바로 자기 가족 내부에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헌병이나 비밀경찰처럼 그들의 주구 노릇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양심적인 애국자들도 많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33인의 지도하에 5만여 명의 군중들이 운집, 침략자들에 맞서 궐기했다. 그들은 관청, 병영, 경찰서 주요 공공시설들을 습격했고 전신과 전화선 등을 끊어 동경과 연결되는 일체의 통신수단을 두절시켜 버렸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통신이 재개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틀 후에 중무장한 일본군이 쇄도해 들어와서는 민중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이 손에 쥐었던 것은 기껏해야 무기라고도 할 수 없는 몽둥이나 돌멩이 그리고 칼과 같은 것들뿐이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헌병대로부터 빼앗았거나 병영이나 경찰서에서 탈취한 총이나 화기를 지닌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스에서 발간되었던 한인동포신문 및 잡지에 실린 만화 그림들을 보면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내가 이야기하는데 그들을 보고 짐승 같다고 한다면 그 말은 한마디로 짐승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내가 그때 읽었던 기사들 중 몇몇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보겠다.
그들 적들은 희희낙락하면서 어린아이 가릴 것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들은 집안까지 쳐들어가 갓난아이들을 낚아채 가지고는 공중으로 집어던진 다음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기독교 신자들한테는 십자가를 만들게 해 그것을 짊어지게 한 다음 그들을 어느 담벼락이랄 것 없이 그 구석으로 몰아붙인 다음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하나님도 이렇게 죽었으니 너도 이렇게 죽어라."
그들은 이 방법 말고도 그들이 늘 해왔던 여러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교회들을 불태웠다. 한 목조 교회 안에서는 350여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밖에서 휘발유를 부리고는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도록 문마다 경비병을 세웠고 그런 뒤 교회에 불을 질렀다.
한편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날로부터 서너 집에 칼 한 자루만 쓰도록 명령이 내려왔다. 이 칼들은 양파나 채소들을 자르는, 다시 말해 부엌용 칼이었는데 그나마 이 칼로 그들에게서 배당된 것이었다. 다 쓴 다음에는 각 동네의 책임자에게 다시 넘겨주어야만 했다.
또 집에서 가족들끼리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한국의 관습, 문화에서부터 한국말까지를 일체 말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일본말을 강제로 배우게 했다. 어느 누구도 한국말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한국 젊은 남녀들 사이의 결혼을 불허했다.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 아니면 그 반대 경우의 결합은 허용했다. 그러나 40세 이상의 나이 든 사람에게는 한국인들끼리의 결혼을 허용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한민족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의 해방
한국은 정치적으로 이미 망한 나라였다. 마찬가지 한민족은 일본에 동화되었고 문화라는 것은 완전히 전소되어 사라졌다. 반대로 일본제국은 군사력을 통해 강대해서 중국 대륙까지 수중에 넣고자 시도하였다. 중국은 장개석이 지배하던 시절, 휘하 장군들의 반목으로 인해 그리고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만주지방-침략자들은 후에 이곳에다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을 잃었고 또 상해도 점령당했다.
당연하지만 대만을 포함해 이 세 나라의 민중과 부는 그들에 의해 철저하게 착취당했다. 일본의 군국주의 정권은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은 동아시아 지방을 정복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으므로 추축국에 대한 약속 의무를 소홀히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때까지 완성시키지는 않았지만 치명적인 살인 병기를 개발해놓고 있었다. 일본이 미국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은 전술한 무기(원자탄임)를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결과는 두 도시의 파괴로 나타났다. 일본 수상은 천황에게 이 사실을 감추려고 했으나 미국이 세 번째의 원폭 투하 위협을 가해오자 그는 천황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천황은 미국에 항복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아시아 총사령관은 그 항복을 수락했다. 미국이 내건 조건은 무조건적인 항복이었는데 패전국 일본으로서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승리한 미국은 그들의 무기들을 신탁통치하에 있는 한국 정부에 인도할 것을 명령했다. 그것들은 군사 기물들로서, 즉 전함에서 시작해 공업시설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한국에 비치된 것들이다. 동시에 천황의 모든 일본인 신민들은 그들이 점령한 땅으로부터 철수, 하나도 빠짐없이 그들 나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뒤 한반도의 북쪽이 남쪽을 향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 조선군대는 소련 무기와 소련 기술자들의 원조, 그리고 중공 의용군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남은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 국제연합군이 창설되면서 여러 나라들은 지원병을 보냈다. 이 선전포고 없이 일어난 전쟁에서 6백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소련이나 미국은 서로 양보를 거부했고 이 자그마한 반도를 분할했다. 소련은 한반도를 지배할 목적에 한국인들을 부추겨 개입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미국과의 우호를 깨뜨렸다.
한편, 서방세계는 소련의 개입을 곱게 보지 않았다. 반대로 미국의 개입은 이전의 침략 당사자였던 일본의 위협에 대처하는 행동으로 간주,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필요로 이루어진 해방
한국인들은 이런 국제적인 연대로 인해 한반도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면했다. 만약, 반대로 그들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 이름이 이미 28년 전부터 이 지구 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인식해야만 한다.
정말로 한국민족은 전통적으로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민족이 독립한 지 몇 년에서 이백 년도 채 안되는데 비해 이 민족이 섬나라 사람들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겨우 4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한국처럼 이렇게 발전한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의 박애 정신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나의 의견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민족에 대해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반감을 언제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인들은 엄밀하게 말해 불굴의 민족인 것이다.
어느 한민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목적에서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한 개인이나 한나라의 발전을 정체케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특허의 경우를 보면 전체에서 25%만이 순전히 미국인들로부터 나온 것이고(그것도 여러 이민 후손들에서 나온) 나머지 75%는 다른 나라에서 신청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현상은 그것과 관련한 한 나라의 담당 공무원들의 "무능"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로서 특허 담당 심의관이 발명자의 특허를 미합중국에 신청한다. 그러면 체제의 미비나 자금능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국에서는 퇴짜를 맞은 발명품을 미국은 심사에 붙인 뒤 그것이 통과되면 특허장을 발부해 발명자를 보호하고 나라를 발전시킨다.
중요한 것은 발명자의 나라에서는 발전이 멈춰진다는 것이고 또 모든 분야의 산업이나 상업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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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시 지금 양대 세력의 한족으로부터 통제를 받고 있다. 한편 소련은 자유경제 체제는 아니지만 범죄성을 덜 띤 채 경제나 군사부문에서 나머지 한쪽 세계를 지원하고 있다. 심지어 이 두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생활영역까지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통일
한국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은밀히 활발하게 펼쳤지만 외부 세계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한국민은 그들 자신의 국기를 사용해 볼 기회도 잃은 채 일장기 아래 복종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돌연 두 이데올로기 깃발이 펼쳐졌다. 하나는 공산주의의 깃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깃발인데 전자가 인민을 억압하면서 통치한다면 후자는 인민에 의해 다스려진다. 이 두 깃발 아래 이 세계가 어디로 갈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공산주의 아래서 모든 자원은 관리나 인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부나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별로 신통치 않다. 자본은 공정하게 분배되어 공평한 세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거기에는 바로 이 정의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에 공평성 아니면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국민들은 양쪽이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너무 집착되어 있고 또 그것은 너무도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양쪽의 정부는 교묘한 수단을 동원, 국민을 설득, 통치하고는 있지만 그러는 동안 정작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위정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국민인 것이다.
비판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과 북 쌍방이 한쪽의 정부 체제나 생활에 대해 서로가 파괴적인 비방을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은 상호 민중들 사이에 불신만을 가져올 뿐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남북 형제들이 합쳐질 가능성은 점점 적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남북 양측의 화해를 위한 적십자의 중재 노력을 통해 두 개의 한국이 서로 통일 방법을 모색하는 노력은 정말로 찬양받을 만한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당사국의 직원들로 구성된 적십자 활동보다는 중립국 사람들로 구성된 국제 적십자가 소집되어 활동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양측이 해결 가능한 실제적인 문제를 놓고도 서로가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합리적인 시각은 분명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
두 개의 한국이 엄존하는 이런 상황에서 양쪽 정부는 확고한 기초를 다지고 있어서 이 두 정부가 계속 존재하는 동안에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양측이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즉, 두 정부 체제를 완전히 해제시킨 뒤 판문점에 본부를 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정부를 택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정치적 분쟁에 휘말림 없이 양쪽 국민들의 왕래도 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는 곳을 자유롭게 선택해, 그곳의 정부가 부과하는 조세법을 따르면서 공장을 건설하거나 상업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쪽 정부가 이 어렵고도 험한 도정에 합의를 본다면 외국의 이해 당사국들과도 동시에 내정 불간섭, 즉 그들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공작 요원들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들의 공작 정보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모략을 통해 일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어야 할 것이다.
예언
다시 한국에서 내전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약 1세기 전 한 한국인이 한말 즉 "한국에서는 인구밀도가 1평방 킬로당 한 사람이 될 때 비로소 한국적인 평화가 시작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예언은 한국의 경우 너무도 치명적인 결과를 빚었다. 나는 이 예언을 유까딴에 있을 때 이제는 돌아가신 한국인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만약 이런 예측에 솔깃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한국에서 조만간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멕시코시 한국 교민회의 장래
벌써 몇 년 전부터 한인 사회의 분위기는 침체되었는데 특히 모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한인 사회의 이 같은 위기는 주로 교민들의 무관심에서 기인한 것이 있다. 이미 약속한 말에 대해서는 설사 개인적으로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고 많은 경우,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했다. 한인 사회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인해 말로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설사 그들이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인회 집행부가 일단 승인되면 그들에게는 몇몇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대 사회적인 주도권이 주어진다. 사회 활동을 위해 새롭게 들어오는 회원들을 폄하하고 그들에게 파괴적인 비방을 일삼고 그것을 널리 퍼드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아무런 비판 없이 침묵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단지 그들의 이런 행동은 사실 한인회를 발전시키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의견을 넌지시 개진하고 드러나지 않게 행동한 것이 때때로 여러 오해도 불러일으켰지만 말이다.
한인회는 회장, 총무, 재무담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세 사람은 전폭적인 신뢰를 부여받아 한인회를 운영한다. 그러나 임원들이 무능력하며 그들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에는 사임해야만 했다.
단지 명함 속에서만 빛나는 그 기능 가지고는, 다시 말해 회원 없는 협회로 현재의 한인회가 버티는 것처럼 한인회가 소멸될 때까지는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몇 년 전부터는 이전의 관행처럼 매월, 또는 격월 아니면 3개월마다 해 왔던 회의 소집 공고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소집이 한인회 임원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한인회가 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힌 단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것은 같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한인회는 전에 적기는 하지만 보조금 지원이나 청탁으로 유지되지 않았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 보조금은 순전히 한인회관 임대료를 지불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해, 지금 한인회 대표들이나 이사회 임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활동 부진으로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린 상태고 기타 한인회 회원들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3.1절 기념식이나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새해 광복절과 같은 공정 모임이 있었다. 특히 광복절에는 대사관에서 우리를 초대했고 나머지 다른 경축일에는 교민회가 대사관 직원들은 초대하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몇 년 전부터 교민회 전체 총회가 열렸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 총회는커녕, 교민들 모임도 없었으며 이전부터 쭉 있어왔던 '선택된 사람"들만의 회합도 없다. 나는 그것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등의식을 갖고서는 한인회를 멀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한인회에 참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또는 한인회에 대한 그들의 냉담한 태도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거짓말을 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또 어떤 편을 가르자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러나 상황이 바꿨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요즈음 대사관에서는 1년에 단 두 번만 우리들을 초대하는데, 여기에 바로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특히, 3.1 운동 기념식이나 8.15 광복절에 아마도 광복절은 공식 국경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초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반면 3월 1일은 멕시코 11월 20일 멕시코 민중혁명 기념일에 해당된다.
한편 우리들이 세대를 걸쳐오면서 한국 국적을 갖고 잇지 않은 많은 한인 후손들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명목뿐일지라도 한인회가 존속하고 있고 또 혼혈 화가 이루어질지언정 한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한 한인회의 명맥을 이어나가야만 할 것이다. 비록 이제 우리들이 한국인은 아니지만 민중이 봉기했던 3.1절 기념일 같은 날에는 매년 회합이 열리도록 노력해 대사관 직원들도 초청해 사회적인 연결 고리를 찾고자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다
나는 이제 한인회의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한인회 일에 관여할 어떤 생각도 없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하나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차이점은 서로가 생각하는 기준이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건강 때문에 명예직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의 사회적인 명예에 손상을 입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한인회 일에 손을 떼려고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나는 영향력 있고 유력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배우지 못한 사람, 다시 말해 나를 보고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나는 3월 1일을 기억해 내고는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수술 바로 전날이었다.
대사관에서 아직도 나를 기억하리라 생각하면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지만 대사관 직원하고의 통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단지 응답할 뿐이었다. 헛수고였다. 뒤에 한인회 회장에게 편지를 띄웠지만 그것도 공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리고 의술에 전념하셨던 의사 선생의 기적 같은 도움으로(물론 이분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정성으로 보살펴 주셨다) 나만이 행인지 불행인지 흙 속에 묻혀 있지 않고 나만이 여전히 땅을 밝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병원에 입원한 이래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에 같은 병으로 열 명이 수술을 받았는데 그들 모두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더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죽음에는 그들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퇴원을 했다. 그러나 내가 45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가족과 친구들(그들은 한인회 사람들이 아니다)을 제외하고는 멕시코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누구 하나 위문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호세 오르떼가 &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가 한 "인간들을 알면 알수록 나의 개가 더욱더 사랑스럽구나"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이런 것과 관련된 경구들을 적어보겠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족속에게 친구라는 개념은 없다."
플라우토(역주: 기원전 로마의 희극 시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은 서로 늑대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인간이야말로 같은 인간을 죽이는 최악의 살인자다."
테렌시오(역주: 기원전 194-159년의 로마의 시인):
"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것도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
나는 또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문화는 전쟁의 기술(技術)이고, 문맹은 학살의 기술이다."
마키아벨리(역주: 1419-1527. 이탈리아의 정치가며 학자):
"분열시켜버려라!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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